“당신은 무슨 일인데 기가 찼었어?”
모처럼 훈계 삼매경에 빠졌던 남편의 뇌가 이 한마디에 재빨리 제자리를 찾았다. 그의 눈에서 초롱초롱한 빛이 나고 있었다. 잊혀졌던 기억이 되살아난 것처럼, 방바닥에 떨어진 동전이라도 본 것처럼, 다 시들어가던 잡초가 폭우를 맞은 것처럼, 눈이 번쩍이면서 얼굴에는 생기도 번쩍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지?
모처럼 밝아진 화색에 애리가 귀를 기울였다.
“그 쿠폰 남았는지 두희씨한테 물어볼래? 내가 지금 기분이 꿀꿀한 게 그 놈의 골프 때문이야. 모레 부장님이 자동차 사람들하고 골프 치러 가기로 했는데 집안에 상이 날 수 있어 못 간다며 내보고 가라네. 골프 채 잡아 본지 언제인지도 모르는데. 공이나 맞추려는지 모르겠다. 이틀만이라도 휘둘러보고 가면 낫지 않을까?”
초상이 났으면 났지 날 수 있다는 말은 뭐야? 잘난 척하고 떠든 지 불과 일초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사내 자식이 한 입으로 두말을 한단 말인가? 저게 내 남편이었나? 애리 머리에 자동 원격 장치나 달린 것처럼 자동적으로 좌우로 가로저어지고 있었다.
일단은 분리된 생각 중에 하나는 버리기로 했다. 당신이야 기가 차던 말던 자존심 상하게 그 부탁을 정신 사나운 주둥이에게 어떻게 해? 애리 얼굴이 폭우를 맞아 늘어지고 찢어진 잡초처럼 일그러져 집에 들어올 때보다 더 흉악한 꼴로 변해 버렸다. 먼저 어이없는 웃음부터 던져주었다. 그 다음으로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부탁은 하기 싫다는 말을 하려다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부터 물었다.
“돈은? 제일 비싼 주말에 대타로 보내는데 설마 당신 주머니를 털라고 한 건 아니지?”
남편 목구멍에서 나는 소리가 드르렁거리다가 멈췄다 출발했다 반복하는 고장 난 엔진 같았다. 이런 식의 파동! 거친 굴곡 없이 높낮이를 조절해 계속해서 이어지면, 흥얼거리며 약을 올리는 걸로 착각하기 딱 좋은 소리지만, 이런 소리를 낼 때는 남편이 난감할 때 내는 신음소리란 걸 잘 알고 있었다.
또 쓸데없는 기대를 했다는 후회와 자책을 하면서, ‘부디 기억을 되살려 그 부탁만은 거두어 주시옵소서!’하면서 남편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신혼 초 때였다.
자동차 하청업체의 신입사원이었던 남편과 두희 남편과 같이 식사 자리를 가졌다. 그날이 부부간에 상견례 자리면서 동시에 송별식자리이기도 했다. 남편은 양복을 입고 두희 남편 될 사람이고 지금도 남편인 남자가 회사 복을 입고 나왔다.
두희가 늘 소망했던 그 옷이었다. 그 옷만 입고 출퇴근은 하면 인물도 인품도 필요 없다며 그 옷만 숱하게 쫓아다니며 고르고 또 고르고, 차이고 또 차인 끝에 갈망의 결실을 맺은 날이었다.
“신랑 될 사람! 여기 다녀.”
옷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결혼 해봐야 알지 란 생각부터 했다. 그때 두희는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될 근무 년 수까지 말을 하면서 남편의 자존심을 샅샅이 뭉개버렸다.
그때 ‘얄궂은 대학 그거 나올 필요 없어.’ 이 말을 하며 두희 남편은 두희 말에 흡족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부의 말과 미소는 남편과 자신을 향했다는 걸 남편이 알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싫다며, 응급실에서 내뱉은 말을 지금까지 지키고 있었다. 그날 응급실로 간 이유는 매운 땡 고추 때문이었다. 두희 남편이 앉자마자 식사비는 자기가 낸다며 음식까지 땡 고추 범벅인 음식으로 시켰다.
거기까진 자존심이 상해도 용납을 했지만 그 후에는 남편은 눈물 콧물뿐만 아니라 위 세척으로 먹은 음식까지 전부 쏟아내며 울면서 치를 떨어야 했다.
부부는 닮는다고 그땐 결혼전이라 부부가 아니었는데도 두희처럼 오지랖을 떨면서 쌈을 싸서 남편 입에 쑥쑥 집어 넣어주었다. 그것도 자기 입에 넣었단 뺀 혀 바닥으로 핥은 손가락을 이용했다. 그건 마치 혀에 쭉쭉 빨린 손가락으로 김치를 쭉쭉 찢어 입에 넣어주는 행위와 같았다.
지금도 남편은 그때 먹은 음식과 김치를 보면 가끔씩 트라우마 증상을 나타내면서 헛구역부터 한다.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그 음식을 요리해줘도 똑 같은 증상이 나타난다는 말을 하며, 만약에 그 요리사가 문제가 뭐냐고 물으면 두희 남편에게 시식을 시켜보면 이유를 알 거라는 말을 할 정도로 두희도 두희 남편도 남편은 싫어했다.
애리는 절대로 남편을 비웃지 않았다. 이 생각을 하는 내내 인상이란 놈이 제가 알아서, 스스로 남편을 비웃고 있었다. 남편이 비웃는 의미를 몰랐다면, 남편은 직장뿐만 사회생활에서도 눈치 없는 인간으로, 실패자나 다름없다. 그래서 아직 차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을 때쯤 애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남편도 똑같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요즘도 두희씨 헤퍼? 여자는 팬티만 잘 벗었으면 된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아직도 그래? 그 놈의 두희씨 팬티가 헤펐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지. 지금도 같이 사는 걸 보면.”
이 뒤로 무슨 말이 나올지 귀가 닳도록 들어서 대답은 하지 않고 시큰둥한 미소만 지으며 쳐다봤다. 예상대로 여동생에게 몸가짐 조심하라는 말을 하듯이 스스럼없이 나왔다.
“괜히 같이 다니다가는 똑 같은 년으로 취급 당해. 나도 부장이 골프 쳐야 된다고 닦달을 하는 바람에 배웠다가 지금 이상하게 됐잖아. 입만 열면 실력 좀 늘었나? 이런 식으로 연습장에 늘 붙어사는 자기 기준으로만 물어 보고 있어 염장이 뒤틀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이번에 가면 내 실력을 제대로 보여 주고 다시는 골프 얘기 못 나오게 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어 답답해. 못 치는 것은 동반자에게 민폐나 주는 짓이고 예의를 벗어난다는 것도 잘 알지만 그보다 더 걱정은 칠 줄도 모르는 놈을 보냈다며 우리를 무시하냐? 그 말 뒤로 나올 회사의 피해가 솔직히 두렵다. 그러니 어쩌겠어? 더럽더라도 그 놈 쿠폰을 좀 써야지.”
한마디라도 틀린 말은 없었지만 애리가 원했던 말은 이 말이 아니었다. 위로는커녕 가슴만 더 짓눌린 기분이었다. 이후 며칠 동안 허공에 떠 있는 느낌으로 지내게 되었고 그 사이 남편은 대타로 골프를 치러 갔다가 서너 달 동안 쓸 용돈을 모조리 탕진하고, ‘땡!’하면 귀가하는 이전보다 더 착실한 남편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런 남편과 발을 맞추지 않을 수 없었던 애리도 두희뿐만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과도 예전처럼 만나는 횟수를 줄이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고 있었다. 그건 줄어드는 매출이었다. 찾지 않은 만큼 매출도 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남편과 보세 옷 가게이지만 그래도 사업을 하는 자신과는 확연한 괴리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두희와 그의 지인들을 다시 가게로 놀러 오라고 할 수도 없었다. 너무 냉정하게 멀리 했다는 자책이 애리의 손가락을 망설이게 해서였다. 그렇게 또 시간이 지나고 어울리는 사람들과도 변화가 있을 때쯤 두희가 불쑥 찾아왔다.
“애는 아예 인연을 끊고 살 작정을 했어? 어떻게 전화 한번 안 해? 손님은 좀 있어?”
찾아오지만 않았지, 부르지도 않은 자리에도 철면피를 쓰고 다니는 년이 모를 리가 없다는 증명을 치켜진 입 꼬리가 대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