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자초한, 자업자득한 이 분위기를 되돌릴 책임까지 져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분위기 전환을 위해 앞으로 얼마나 더 해야 할 지 모르지만 또 한번 정신 노동을 해야만 했다. 이때를 우리는 살아온 인생에서 터득한 경륜이 필요하다고 한다. 아주 강력한 방법인 연민을 택해 바로 반전을 유도하기로 했다. 이런 걸 분위기 반전이라고들 한다. 불리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측은한 척하며 상대의 가슴을 삽시간에 뭉클하게 하거나 아니면 상대가 위로 받고 싶은 무언가로 반전을 시켜야 하지만 이 놈에겐 딱히 그런 위로 받을만한 사연이 없다. 물론 있었겠지만 자기가 단 한번도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모른다. 수리는 자신의 최고의 무기를 사용하기로 했다.
“그때 생명을 다시 얻고 돌아 올 땐 산도 들도 파래서 새 세상에 나온 기분이었는데…..”
그리고는 그때가 떠오르는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고는 차창 밖만 쳐다 본다. 걸려들어라 기도를 하면서 이 놈의 반응을 기다린다.
“그래서…. 뭐? 새끼가 내 말에는 대답도 않더니… 새로 살아 나와서 뭐 달라진 게 있어? 참! 기억은 다 돌아왔어? 내가 보기엔 정상인데 아직도 궁금한 게 있어? ”
기억이야 당연히 돌아왔다. 누가 나쁜 놈이었는지는 확실이 돌아왔다. 그보다 방금 전 짜증스럽게 응대한 대가는 치르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작전대로 걸려들었다는 말이다.
더 이상 별 생각 없이, 앞 뒤 가리지 않고 툭 던진 실언으로 토닥거릴 불편은 덜었지만 그래도 내심 불안하다. 바로 앞 전에 괜히 짜증이 나 툭 던진 말에 상한 감정을 깨끗이 씻어내려면 더 강한 방법을 택할 수 밖에 없다. 이 놈이 궁금한 건 조금 있다가 말하면 되고 지금은 더 세차게 몰아붙여 생각을 완전히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한다.
“자식이! 이젠 나이도 들만큼 들었고 주위에 보는 눈도 많으니 자식이나 새끼 같은 단어는 그만 쓰고 형님이라 불러라. 집안에 일이 있을 때마다 네가 내 이름 부르면 섬뜩, 섬뜩 하다. 박씨 집안은 예전부터 성이 많이 알려져 있고 또 양반으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 ‘마’ 가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아서 내가 상놈출신인지 양반출신인지 모르잖아. 그런데 자네가 이 새끼 저 새끼 하면 내가 상놈 출신으로 사람들이 알 거 아니냐? 그건 자네 마누라도 상놈이란 말이니 이제 나이에 걸맞게 언어순화 좀 하게나. 박서방!”
어이없다는 듯이 한참을 쳐다보고는 입술을 비틀고는 가소롭다는 듯이 넌지시 웃는다.
“갑자기 자네는 또 뭐냐? 이 놈이 저승에서 쫓겨나오더니 정신을 놔두고 왔나? 너! 쫓겨 나온 게 아니고 도망쳐 나왔지? 급하게 도망친다고 정신 줄은 흘리고 나왔구나!”
“그래! 내 나이가 아까워서,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억울해서 도망쳐 나온 게 아니고, 그 동안 뿌려둔 경조사에 나간 축하금과 부의금도 받아야 해서 도망쳐 나왔다. 그런데 도망쳐 나오기 전에 인간의 간사한 속셈을 깨달았다. 그래서 반드시 나와야 된다고 이을 악물고 나왔다. 친구가 생사를 오가는 데 병문안 온 놈이 어떻게 한 놈도 없었냐? 그 생각을 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을 알았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반성도 했다. 그 동안 내가 잘못 살았다. 너도 내 동생 신랑만 아니었다면 안 오고도 충분히 남을 놈이었다. 특히 자기들이 필요할 땐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알랑방귀를 뀌던 놈들이 제일 먼저 떠오르더라. 그때 만약에 내가 죽었다면 그 놈들은 발 뻗고 잘 놈들인데 내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왔으니 지금 그 놈들, 아마 잠 못 이룰걸. 길가다가 눈 마주칠 까 싶어 숨는 놈도 있을 걸. 그때 네가 보낸 문자에 ‘희망이 없다’란 말이 들어 있으니 모두들 방심했겠지. 내가 이렇게 살아올 지, 꿈에서도 몰랐을 것이다. 누가 했는지 모르지만 이런 말이 떠오르더라. 권력을 가진 사람이 키우던 개가 죽으면 문상객이 줄을 서서 애도를 하지만 그 사람이 죽으면 그만큼 오지 않는다는 말! 그 찾아 온 문상객들마저도 서로 눈 도장을 찍기 위해서지 진정으로 애도를 하지 않는 말. 그게 떠오르더라”
처음엔 의미심장한 말로 들렸는지 심각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더니, 말이 길어질수록 인상은 일그러졌고 마지막 말에 기어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아! 뭐 이런 놈이 다 있냐? 의식불명인 놈이 누가 병문안 오고 안 오고 어떻게 확인했어? 누가 병문안 올 때마다 의식이 팍팍 살아 나더냐? 그래서 평소 버릇대로 일일이 메모했어?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그 버릇은 나온 모양이지! 무서운 놈! 정나미 떨어지는 놈! 소름 끼친다. 이 놈아! 정말 죄송합니다. 형님! 메모할 기회를 제가 박탈했습니다. 제가 형님 정신이 온전치 않다고 아무도 오지 마라고 했습니다 요. 안정이 필요하다고. 그래서 메모장이 텅텅 비었겠네요. 어휴! 그때 생각하면… 참! 울지도 못하고 웃지도 못하고… 간호사가 묻더라. 네가 뭐 하는 놈이냐며. 병문안은 둘째치고 차도가 어떤지 묻는 전화가 너무 많아 귀찮을 정도였다 더라. 또 간호사에게 오늘 밤에 양주 한 박스하고 친구들 다 부르라고 해서 내가 얼마나 얼굴이 화끈거렸지 아냐? 내가 한시라도 네 옆을 못 떠났다. 병원에서 가출 사건은 기억나? 갑자기 네가 사라져서 서너 시간을 찾아 다녔는데…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오더라. 기억나? 환자복 입고 호프집에 가서 아가씨 데려 오라고 난리 난 거? 하여튼 소갈머리하고는.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마누라도 아닌 마누라 오라비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지….”
이 말에 수리가 잠시 미안한 표정으로 영철을 쳐다본다. 이 말은 이 친구! 박서방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에게도 자주 했다고 들었다. 그때 중환자만 아니었다면 지금 세상을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미 투의 가해자의 한 사람으로 골머리 꽤나 썩을 상황의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영철은 핸들을 잡지 않은 한 쪽 손으로 수리 어깨를 세게 한대 세게 치고는 웃는다. 수리는 실제로 그때, 쓰러지기 전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 한 가지 기억 나는 건 쓰러지기 전날 일 손이 부족해서 이 놈이 일을 도와주었고, 그 날 저녁에 맥주 두 병과 소주 한 병을 사서 집에서 마시고는 다음 날 일찍 나가야 된다는 말을 하고는 누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