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하며 안일하게 생각한 점도 있지만, 아무리 녹림이라도 거지를 상대로 재물을 약탈 하리라고는 생각을 안 한 이유도 있었다.
“염병, 재수 더럽게 없네. 달포만의 첫 수입이 거지들이라니 카악, 퉤!”
요 근래 들어 지들이 뿌린 악행이 소문이 나, 급하지 않은 다음에야 이곳을 지나가는 상인이 줄었다. 이에 화풀이라도 하려는 심산이었다.
재수 없다고 불평하며 침을 내뱉은 놈이 잠시 잔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는 눈빛이었다.
“혹시, 놈들이 거지로 위장할 수도 있으니, 일단 샅샅이 뒤져보고 없으면 끌고 가서 잡일이라도 시켜라. 헛험, 저기 저쪽에 있는 놈은 살살 다뤄라.”
조장의 말에 명을 받은 사내는 거지같지 않은 수려한 외모를 한 화령을 힐끗 쳐다봤다. 어제 강에서 물놀이를 하며 몸을 씻어낸 탓인지 미녀 못지않게 미색이 뛰어난 미공자의 얼굴이었다.
그제야 무슨 말인지 감 잡은 사내는 느끼한 목소리로 히죽거렸다.
“흐흐흐. 알겠습니다. 조장님.”
녹림의 무리들이 작당해서 지껄이는 사이에 전갈을 받은 한 무리의 녹림도들이 나타났다.
“어디, 뭐 건질 것 좀 있느냐?”
“부채주님. 오셨습니까!”
부채주 장가위는 흑천방에서 어렵게 영입한 뛰어난 고수였다. 장가위가 들어올 때 고수들을 데려와 흑천방의 무력이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다.
부채주라고 불린 장가위는 화령일행을 한차례 슥 훑고는 말을 내뱉었다.
“몸이 근질근질해서 내려왔더니, 괜한 헛걸음만 하고 말았네. 어이 그것 좀 꺼내봐라.”
“예, 부채주님.”
부채주의 말에 부하가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건네줬다. 부채주가 펼친 두루마리에는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한 장씩 넘기며 화령 일행의 얼굴을 하나하나 대조하기 시작했다.
“젠장, 시키는 거라 어쩔 수 없이 하긴 하는데 말이야. 가만 얼굴이 좀…….”
부채주는 화령의 얼굴에서 멈췄다. 어딘지 풍기는 분위기가 그림과 많이 흡사하게 느껴졌다.
“이거, 이거 비슷한데 안 되겠다. 일단, 모두 끌고 가라.”
“예. 모두 엮어라.”
만약에라도 맞으면 횡재 한 것이고, 아니면 데려다 쓰면 될 일이었다.
기가차서 가만히 하는 양을 보고 있자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더 이상 두고 볼일도 아니기에 왕우보는 소방주님을 비롯한 모두를 싸잡아 업신여기는 녹림도 놈들 앞으로 나섰다.
“에잇, 이놈들이 보자보자 하니까 우리를 뭐로 알고…….”
“멈춰라!”
참지 못하고 씩씩대며 앞으로 나서는 왕우보를 칠 장로가 급히 제지하고 나섰다.
나중에 등장한 인물들의 무공실력이 예사롭지 않게 보여서 노파심에 칠 장로가 나선 것이었다. 그런 칠 장로를 보고 녹림도는 같잖다는 투로 말했다.
“어이, 뼈 부러지기 전에 그냥 가만이나 있지. 별 늙은 거지가 천지분간을 못하고.”
“크억! 이런, 처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
명문정파인 개방임을 내세워 원만하게 해결하려던 칠 장로는 사파인 녹림도의 말에 그만, 개 거품을 물었다. 제자들을 진정시키려 했던 자신이 오히려 꼭지가 도는 상황이었다.
어금니를 꽈 깨문 보연이 나서서 녹림도들에게 경고를 날렸다.
“화를 당하기 전에, 좋게 말로 할 때 어서 썩 길을 비켜라.”
보연의 말에 녹림도는 느끼한 웃음으로 대꾸했다.
“으흐흐흐흐, 고거 앙칼지기는. 가진 것이 없으면 몸으로 때워도 무방하다.”
이에 보연이 비웃으며 맞받아쳤다.
“큭큭큭,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녹림도는 뭘 믿고 저러나 싶어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맘 변해서 다 찢어 죽이기 전에 순순히 말 들어라. 엉.”
화령을 대놓고 쳐다보며 음흉한 눈빛을 보이는 놈 때문에 보연을 비롯한 모두는 살기를 피워 올렸다. 자신들의 주군인 소방주를 욕보이는 놈에게 참기 힘든 분노가 터진 것이었다.
-스으으
“허업!”
갑자기 쏘아지는 살기에 기겁을 하며 사내는 뒷걸음질 쳤다. 뒤에 있는 부채주라는 자도 느낄 정도로 강한 살기였다.
“야! 산채에 신호를 보내라. 간만에 몸 좀 풀어야겠다.”
“예, 부채주님.”
-삐이이이
부채주인 장가위는 상대가 거지로 위장한 정파 나부랭이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개방의 거지라고 하기엔 조금 전에 펼친 살기가 제법 위력적이었다.
장가위로부터 시간을 끌라는 눈짓을 받은 조장은 손을 벌리고 다시금 말을 꺼냈다.
“허허허, 이거 왜들 이러시나. 흑천방의 구역을 지나가는데 성의 표시를 안 하고 이렇게 나오면 우리가 많이 섭섭하지. 안 그래!”
아니, 거지가 돈이 어디 있겠는가! 통행세를 달라고 지껄이는 녹림 나부랭이의 말에 가당치도 않는 화령 일행이다.
굳이 피를 보고 싶지 않은 화령은 안 되겠다 싶어 나섰다.
“보다시피 우린 거지고, 가진 거라고는 몸뚱이가 전부다. 그러니 비켜라. 안 그러면 실력행사에 들어가겠다.”
“뭐, 그쪽 말처럼 몸뚱이도 괜찮고, 글쎄 실력행사라……, 빌어먹을 것들이 무릎 꿇고 빌어도 시원찮을 판에. 크크크.”
지금 처한 현실을 부정이라도 하고 싶은지 죽으려고 덤비는 거지들을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조장은 부채주를 힐끔 쳐다보며 자기 손에서 처리 하겠다는 눈짓을 보냈다.
장가위는 뒤를 봤다. 저기 산채 식구들이 때마침 오는 게 보여 수락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스릉, 차르륵
녹림은 조장을 필두로 각자의 개성대로 가진 무기들을 일제히 꺼내들었다.
“저 둘만 남기고 나머지는 죽여도 좋다.”
“예. 모두 쳐라!”
녹림의 무리들이 일제히 흉흉한 무기들을 앞세워 달려들었다.
“소방주님. 저희들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보연은 자신의 허리춤에 감춰져 있던 타구봉을 재빠르게 꺼내 들었다. 화령이 말릴 틈도 없이 칠 장로까지 합세하여 녹림들과 맞붙었다.
“하아앗, 견무타행!”
-후우웅
보연이 몸을 옆으로 비틀면서 휘두른 봉에 호기롭게 달려들던 한 놈의 팔이 부러져 나갔다.
-퍼걱
“끄아아아! 이런 씨팔!”
-쉬이이익
부러진 팔에 정신이 헤까닥 나갔는지 사로잡으라는 명령은 집어치우고 구불구불한 기형검으로 보연의 목을 노리고 휘둘렀다.
보연은 빠르게 앞으로 숙이며 파고들어 자신의 머리로 상대의 턱을 받아버렸다.
-콰직
“끄어어어억!”
우보는 철퇴를 무섭게 휘두르며 달려드는 놈을 상대로 압박을 하며 몰아 붙였다.
“별 거지같은 게, 생긴 거와 달리 무공이 제법이구나.”
“흥, 어디 거지한테 주둥이 한번 줘 터져봐라.”
-콰앙
타구봉과 철퇴가 허공에서 격돌하며 굉음을 냈다.
“추견맹목.”
개 몰듯 타구봉을 놀려 상대의 허리를 가격하기 위해 내뻗었다. 그러자 빠르게 피하며 철퇴를 위에서 아래로 내쳤다.
-후웅
보법을 밟으며 피하는 동시에 중심에 앞으로 쏠린 녹림도의 다리를 풍구용퇴의 수법으로 내리 찍었다.
“커억.”
놈은 비명을 지르며 그대로 당에 처박혀 일어날 줄 몰랐다.
부채주 장가위는 싸움 도중에 전체적으로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거지들의 무공실력이 하나같이 녹록치 않아 보였다.
수적인 우세에도 거지들 제압이 쉽지 않음에 주변을 훑어 본 장가위는 우두머릴 잡아야겠다고 여겼는지, 그 중에서 제일 무공이 높아 보이는 칠 장로 쪽으로 몸을 옮겼다.
“크하하하, 늙은이. 내가 친히 저승길에 보내주마. 타앗!”
-후우웅
장가위는 본인의 덩치만큼 큰 도를 가볍게 휘두르며 칠 장로를 위협해 나갔다. 칠 장로도 이에 질세라 맞받아쳤다.
“이놈, 보자보자 하니까. 어디 말처럼 그리 되는지 보자.”
-콰쾅
내력이 실린 봉과 도가 맞부딪치며 굉음을 쏟아냈다. 일급고수를 넘어선 자신의 타구봉을 막아서는 상대에게 내심 놀라는 칠 장로였다.
장가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제길, 생각보다 고수로구나.’
장가위는 흑천방에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제대로 된 적수를 만났다. 격전 중에 퍼뜩 드는 생각이 거지꼴에 자신을 앞서는 고수에다 저들이 펼치는 무공이 언젠가 본 개방의 무공이 맞는 것 같았다.
행색이 거지라 의심은 일부 들었지만 설마하니, 정파의 대 문파일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강호에 거지가 한둘이라야 말이지.
잘못 건드렸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위에서 수배중인 인물이 있어 이대로 보내주기도 뭣하고, 다 죽여서 입막음을 할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이었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긴박한 상황이라 더 이상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거지라고 우습게 봤다가 큰 코 다친다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합류한 유조장은 녹림에 있기엔 아까울 정도로 무공이 남다른 편이었다.
장가위가 들어오기 전에는 흑천 방주 다음으로 고수였다. 이제껏 흑천방의 녹을 먹으면서 지금처럼 고수들과 붙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그때, 격전 뒤편에 홀로 있는 자가 눈에 들어왔다. 수적으로 흑천방의 녹림도가 우세한 상황이었지만, 완전히 압도하지는 못하고 있어서 묘수를 내야 했다. 개방의 무공이 월등히 앞서니 숫자는 소용없었다.
‘저자를 잡으면 상황이 확실하게 돌아가겠는데.’
-촤차창
유조장은 상대를 거세게 몰아붙인 후에 옆으로 빠져 화령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실전은 칠 장로만 제외하고 수하들은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강호 무림이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다반사라지만 쉽지 않을 것인데, 개방의 제자들은 우려했던 것 보다 흑천방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다.
무공을 펼치는 수하들을 지켜보던 화령은 문득,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강시일 때, 수많은 시간을 들여 무공 등을 수련하고, 실전을 치르기 위해 어느 외진 곳으로 이동해 많은 수의 무사들과 검을 섞었던 때가.
그때 사람들을 무참히 베고 찌르고, 그 보다 더한 기억에 화령은 씁쓸해졌다.
그 틈을 이용해 누군가 자신의 왼쪽에서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예기가 잔뜩 실린 날카로운 검이 화령의 옆구리를 갈랐다.
-촤아악
다행히 흑갑을 안에다 입고 있었기에 겉옷만 잘려 나갔다.
“이런, 호신갑을 입고 있었나!”
벌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흑갑을 본 흑천방의 유조장은 사로잡으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곧바로 목을 노리고 검을 찔렀다.
-피이잇
무기가 없는 화령은 적수공권으로 검을 상대했다. 보법을 밟으며 화령은 검을 요리조리 잘도 피했다. 맹렬히 검을 놀렸지만, 처음 이후로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한 유조장은 지쳐서 그만 자리에 멈춰 섰다.
“헉헉, 제길.”
그때,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는 화령의 귓가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파고들었다.
“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