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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천사는 울지 않는다
작가 : 소설부부
작품등록일 : 2017.7.15

영겁의 세월동안 고독과 마음의 평온만을 추구하던 천사 프라.
그가 복잡한 관계로 뒤얽힌 지구의 삶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

...팽팽한 긴장의 줄을 싹둑 잘라 먹었다.

모두가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세라는 잔뜩 힘주어 숨을 참고 있던 참이었었다.

에이씨. 지지려면 빨리 지질 것이지. 할랑 말랑 하는 게 더 고문인 거 모르나.

키가 보통 명마보다 큰 흑마는 구경꾼들을 당당하게 가르고 장교 앞에까지 왔다. 떠오르는 태양을 등지고 검은 후드망토를 길게 늘어트린 존재가 말 위에 앉아 있었다.

 
회상-고통을 삼키는 조우
작성일 : 17-07-15 14:22     조회 : 24     추천 : 0     분량 : 8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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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작은 창이 있고 그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단단한 돌들로 쌓아 올려 진 벽들과 바닥.

 

 이 모든 것들이 보이지만 그것들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혼자 누우면 꽉 차는 좁은 침대. 소년은 그 위에 누워 있었다.

 

 온 몸에 감긴 붕대가 답답했지만 그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기억이 없었고 보이는 것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한 채 두눈만을 뜨고 있었다.

 

 왜 여기 있는지. 여기가 어딘지. 질문도 대답도 없었다.

 

 마치 웅크리고 있다가 주변의 예기치 않은 움직임에 반응하여 꿈틀거리는 애벌레 같은 상태.

 

 자신이 벌레인지 뭐 인지도 알 길 없는, 뭘 모르는지도 모르는 그런 상태.

 

 달그락.

 

 그릇이 나타났다. 그 안에 가득 채워진 것들이 뭔지 모르겠다. 그래서 힐끗 쳐다보고는 그대로 놔뒀다.

 

 그는 계속 잠에 빠져들었다. 잠 속에서도 나타나는 수많은 장면들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어두워졌다 밝아졌다 하는 날들이 계속되었고 힘겹게 뜬 눈꺼풀은 몇 초도 되지 않아 힘이 빠져나가 스르륵 다시 감겨 버렸다.

 

 며칠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 기력이 다해갔다.

 

 숨 쉬는 것도 힘들어 지는 상태가 되었고 온 종일 희미한 숨을 헐떡여야민 했다.

 

 달칵.

 

 

 “싫어요. 내 보내주세요. 무서워요.”

 

 

 낯선 소리에 가까스로 눈을 떠 보니, 철창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긴 검은 머리카락의 여자애가 울면서 소년 쪽을 보며 힐끗거렸다.

 

 예전 같았으면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아이의 가늘고 긴 눈매와 노란 빛이 도는 흰 피부를 보고 제국 밖 동쪽 출신임을 바로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예쁘다고 생각했었을 것이다.

 

 여자아이는 게슴츠레 뜨인 그 눈을 보고는 놀라,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전보다 더 떨고 있는 목소리로 철창 밖을 향해 애원했다.

 

 그 모습이 조금 익숙하게 다가와 아론은 좀 더 쳐다보기로 했다.

 

 연신 철창 밖을 향해 살려달라고 우는 모습에 흐릿한 감정이 머릿속에 스며들어왔다.

 

 가엽은 아이.

 

 그 생각이 들기 시작하자, 호수에 들인 파문처럼 점점 넓게, 넓게 퍼져 나갔다. 멈춰 있던 사고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힘이 없었지만 저 불쌍한 겁먹은 생명을 위해 힘을 내야했다.

 

 천천히 일어나 두발로 섰고 아이에게 다가갔다. 헐떡거리는 숨이 위태롭게 공기를 진동시켰다.

 

 스르륵 스르륵. 바닥에 쓸리는 소리에 아래를 쳐다 보니 두 발엔 각각 쇠고랑이 채어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 아이는 더욱 겁에 질려가고 있었다. 아이는 주저앉아 웅크리고는 살려달라는 말만 계속 반복했다.

 

 다가가 손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손길이 닿자, 웅크렸던 아이가 움찔했다.

 

 힘없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기만 하니, 경계를 쉽게 풀지 않던 아이가 눈을 들어 천천히 그를 보기 시작했다. 아이의 눈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도 조심스레 바닥에 앉았다. 겁이 사라진 아이는 배가 고팠는지 음식이 담긴 그릇과 그를 번갈아 쳐다봤다. 그가 물끄러미 여자 아이만 쳐다보니, 그녀는 쭈삣쭈삣 그릇을 끌어당겨 빵을 먹기 시작했다.

 

 한참 배를 채운 아이는 남은 빵조각을 그에게 건넸다.

 

 그것을 한동안 내려 보고는 여자아이가 했던 대로 입속에 천천히 밀어 넣었다.

 

 아이는 병을 들고 마신 후 그에게도 주었다.

 

 한 모금정도 밖에 남지 않은 과일주스였다. 달콤한 맛과 향에 잠시 기억을 더듬듯 생각에 잠겼지만 검은 장막이 쳐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아이가 눈을 껌벅껌벅 하더니 졸기 시작했다. 졸음을 견디지 못하겠는지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고개를 숙이고 아이의 잠든 모습을 바라보다 그도 잠이 들었다.

 

 정신이 드니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아이는 사라졌다.

 

 

 

 **

 

 

 

 다음 날부터 식사 때마다 음식과 아이가 동시에 들어왔다. 아이는 이곳에서 식사를 한 후 조금 있다가 사람이 와서 데리고 나갔다.

 

 그가 같이 놀아주지도 그렇다고 말 상대가 되어주는 것도 아님을 알고 아이는 혼자 놀 거리를 찾아내었다.

 

 그가 멍하게 있는 동안, 아이는 가지고 온 흰돌로 바닥과 벽에 그림을 그렸다. 한 여자를 그리고 있었다.

 

 

 “우리 엄마는 미하루처럼 긴 검은 머리, 눈도 미하루처럼 가늘고 길어. 엄청 예뻐.”

 

 

 엄……마…….

 

 머릿속에 섬광이 짧게 비쳤지만 그뿐이었다.

 

 

 “네 엄마는 죽었어. 노예상인이 죽였어. 그래서 아론이 화가 나서…….”

 

 

 별생각 없이 지껄이던 미하루는 갑작스레 말을 멈췄다. 무서운 눈을 가진 성의 주인이 떠올랐다.

 

 

 “……엄마……죽었어.”

 

 

 그는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막연히 슬픔이 차올랐다.

 

 머릿속에 바스러지는 고통이 짧게 지나갔다.

 

 그 바람에 어깨가 움츠려들고 얼굴이 일그러졌다.

 

 미하루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괜찮아?’와 같은 질문도 없다. 그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여기 성 주인이 우리를 구해줬어. 그리고 이곳으로 데리고 왔어. 그러니까 말 잘 들어야 한댔어. 시키는 대로 해야 한대. 아론이 말 잘 안 들으면 내가 벌 받을 거라고 했어.”

 

 “……아론.”

 

 “응. 네가 기억 못하니까 이름을 지어 줬대.”

 

 

 아.론.

 

 

 ‘아론이 말 잘 안 들으면 미하루가 벌 받을 거라고 했어.’

 

 

 미하루는 틈틈이 몸짓 언어를 사용해 가면서까지 강조했기에 그 소리는 귓가에서 쉴 새 없이 맴돌았다.

 

 그가 잘 못하면 그녀가 매를 맞는다는 뜻 같았다.

 

 자신 때문에 미하루가 벌 받게 되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요구대로 해 주었다. 씻으라면 씻고, 먹으라면 먹었다. 고분고분 말을 들으니 방도 더 좋은 곳으로 옮겨 주었고 좋은 옷을 주었다.

 

 철창이 아닌 나무문과 커다란 유리창 그리고 푹신하고 좋은 침대가 있는 방이었다.

 

 미하루도 처음 볼 때보다 건강해 보이고 차림새도 날이 갈수록 화려해졌다. 리본과 레이스가 달린 치마를 입기 시작했다. 머리도 땋아 리본으로 장식했다.

 

 미하루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커져갔다.

 

 발에 족쇄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것을 만지작거리고 있을 때,

 

 

 “아론, 여기서 살려면 표시를 받아야 한 대.”

 

 “표……시?”

 

 “여기 성에 사는 사람들은 다 받은 것 같아. 여기 문지기 타미 아저씨도 부엌에서 일하는 셀리나 아줌마도 다른 사람들도 다 표시가 있었어. 요기에.”

 

 

 미하루는 자신의 어깨를 가리켰다.

 

 

 “아론이 표시를 받아야만 나도 줄 수 있대.”

 

 “표시.”

 

 “난 여기서 살고 싶어. 더 이상 도망 다닐 필요도 쓰레기 같은 음식 먹을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야. 무서운 노예상인들한테 잡힐 걱정도 없고. 여기 사람들 모두 친절하고 나한테 정말 잘해 줘. 공부도 시켜주고 하프연주도 가르쳐 줄 거래. 너무 신나.”

 

 “…….”

 

 “받아 줄 거지?”

 

 

 그녀는 한꺼번에 너무 많은 말들을 뱉어 내었다. 대부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간절한 미하루의 눈빛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잔뜩 숨죽이고 반응을 기다리던 미하루의 얼굴이 활짝 피어올랐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는 볼에 입맞춤을 해 주었다.

 

 

 “난 아론이 참 좋아.”

 

 

 그는 빙긋 웃어 보이고는 미하루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

 

 

 두 달 후,

 

 

 “아론, 오늘 그 표시를 받을 수 있대!”

 

 

 마지막 남은 상체의 붕대를 푼 지 하루만이었다.

 

 방문이 열리자마자 신이 난 목소리로 미하루는 소리쳤다. 열린 문 밖에는 덩치가 큰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준비 됐으면 갈까?”

 

 

 남자 한명이 경계하듯 조심스레 들어왔다. 손에든 열쇠 꾸러미를 보여주며,

 

 

 “착하지. 얌전히만 굴면 아무 문제없단다. 밖으로 나갈 거야. 인장을 찍으러 가는 거야.”

 

 

 얌전히 침대에 앉은 채로 있자, 남자는 침대 옆 벽에 단단히 박힌 쇠고리에 채워진 자물쇠를 열고 사슬을 분리시켰다.

 

 미하루가 그의 손을 잡아당겨 일으켰다. 문 밖으로 천천히 걸었다. 발목에 여전히 남아 있는 족쇄와 길게 연결된 사슬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였다.

 

 이제 무겁고 차가운 족쇄와 사슬이 자신의 일부처럼 불편하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는 기분은 꽤 좋았다.

 

 창문을 통해 느낀 빛의 따스함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 기분이 들었다. 온통 다양한 색의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초록의 풀들과 나무들, 하늘, 연한 갈색의 웅장한 성,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들이 두르고 있는 옷에서 빛나는 다채로운 색들. 모두 눈이 부실정도로 강렬한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이곳에 이리 많은 사람들이 있었구나.

 

 모두들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하루는 그런 그가 자랑스러운지 곁에 꼭 붙어 사람들의 시선을 즐기는 듯 생글거렸다.

 

 

 “여기 무릎 꿇고 앉아라.”

 

 

 누군가 말했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옆을 보니 빨갛게 달궈진 화로가 보였다. 그 안에 쇠꼬챙이들이 몇 개 박혀 있었다.

 

 평온했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이것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누군가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나 파갈공작은 오늘이 파갈성에 새로운 미래가 시작됨을 선포한다. 황제께서 친히 허락하신 보물이 바로 우리의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이 보물이 파갈 가문에 어떤 의미를 부여 하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아직은 작지만 점점 큰 보물이 되어 파갈가문을 더욱 강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모두 이 순간을 기뻐하며 미래의 파갈의 모습을 그려보자!”

 

 

 묵직한 음성에서 무리의 대장 같은 힘이 느껴졌다.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사람들이 얼마나 그 연설에 감동받고 공감하는지 보여줬다.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보았다. 이글거리는 매서운 갈색 눈빛과 마주쳤다.

 

 무정한 그의 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는 아론을 보고 웃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지만 강압적인 눈빛은 아론의 복종을 요구하고 있었다.

 

 아론의 눈빛에서 복종을 얻지 못한 파갈공작은 옆에 서 있던 미하루를 자기 쪽으로 잡아 당겨 앞에 세우고는 목덜미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아론의 본능이 그가 비겁한 짓을 하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미하루를 내세워 그를 이기려고 한다는 것을.

 

 언제든지 이 연약한 목을 꺾을 수 있다는 듯 파갈공작의 뜻을 보이고 있었다.

 

 미하루를 봤다. 연신 싱글거리고 있었다.

 

 내가 몸부림치면 미하루가 벌을 받게 되겠지.

 

 매서운 갈색 눈동자를 다시 응시했다. 천천히 눈을 내리 깔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셔츠가 아래로 당겨지더니 어깨가 드러났다. 붉은 상흔들이 드러났다.

 

 거친 손으로 입속에 헝겊뭉치가 쑤셔 넣어졌다. 화로에서 꺼낸 쇠꼬챙이가 누군가의 손에 들려 다가왔다.

 

 공기를 태우는 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지이익.

 

 윽!

 

 인장의 붉은 기운이 어깨를 타고 목 언저리까지 전해졌다. 헝겊뭉치를 꽉 물었다.

 

 치이이이익-

 

 살이 타는 냄새, 상처를 후벼 파는 고통, 온몸이 떨렸고 고통으로 고개가 절로 뒤로 젖혔다.

 

 탐욕을 머금은 인장은 지옥의 불뱀처럼 다가와 어깨에 뚜렸한 잇빨 자국을 남겼다.

 

 싱글거리던 미하루의 표정이 새파랗게 변하는 순간을 보았다.

 

 아론은 고통에 고개를 비틀었다. 파갈 공작에게서 조금 떨어져 서 있는 또 다른 여자아이를 본 순간, 고통이 다른 식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강렬한 인상.

 

 불꽃처럼 타오르는 머릿결과 눈동자. 하얀 얼굴에 뿌려진 주근깨. 꾹 다문 야무진 입술.

 

 그러나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아론은 그녀의 꽉 쥔 두 주먹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

 

 가엽거나 약해보이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아론을 잡아끄는 힘이 강렬했다.

 

 붉은 머리카락과 그 눈이 알 수 없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하얗게 되도록 꼭 쥔 그녀의 주먹에서 눈을 떼지 않고 고통을 삼켰다.

 

 환호성과 박수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

 

 

 

 “세라 아가씨, 서두르세요. 공작님께서 꼭 참석하라고 하셨잖아요.”

 

 “끔찍한 장면을 왜 보라고 그러시는지…….”

 

 

 부러 늦장을 부리는 세라를 유모가 재촉했다. 성의 앞마당으로 안내하는 유모는 연신 뒤 돌아보며 서두르라고 손짓을 했다.

 

 보통으로 새로 들어 온 노예들에게 인장을 찍는 일은 본성의 북쪽에 있는 노예와 일꾼들의 처소가 있는 곳에서 행해졌다.

 

 그러나 오늘은 대단한 행사처럼 본 성의 앞마당에서 치러졌다. 각지에 있던 파갈의 유명 인사들이 며칠 전부터 성에 머무르며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단들도 대부분 참석한 가운데 앞마당은 엄숙하면서도 알 수 없는 흥분으로 가득했다.

 

 다른 노예들은 보이지 않았다. 파갈 가문의 고위층 오십 여명과 부인들, 기사단들 백여 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세라는 어른들이 고작 노예 따위에 이리 요란법석을 떠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앞마당에 도착한 세라는 할아버지인 파갈 공작이 있는 곳에 가서 조신하게 인사를 올렸다.

 

 공작은 가문 사람들을 앞에 둔 육중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때 맞춰 왔구나.”

 

 

 세라를 힐끗 본 후 파갈 공작이 말했다.

 

 

 “다음부터는 나보다 늦게 나타나지 말도록.”

 

 

 냉소적인 공작의 뒷말에 세라는 애써 담담한척했다.

 

 잦은 전쟁으로 부모와 세 오빠들, 삼촌들과 사촌오빠들을 모두 잃은 세라는 홀로 할아버지 옆에 섰다.

 

 싸늘한 기운을 지워버리려고 웅성거리는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석 달 전에 파갈 성에 특별한 노예가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었다. 하지만 몇몇 사람만 제외하고 접근이 금지 되어 있었다.

 

 위험한 나머지 깊이 잠재워 두었다는 얘기도 들렸다.

 

 야수처럼 극도로 난폭하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고,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돌로 변해 버린다는 신화 속에 나올법한 소문도 있었다.

 

 야수처럼 큰 덩치나 기괴한 괴물 같은 형상을 했을 거라는 소문들도 당연히 따라 붙어 다녔다.

 

 무성한 소문 때문에 앞에 보이는 저 존재는 더욱 순수하고 작은 천상의 고귀한 존재처럼 느껴졌었다.

 

 하늘의 중앙에 있는 태양의 빛을 그대로 반사시키는 하얀 불꽃같은 머리카락에 투명한 피부를 한 작은 소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하얀 불꽃.

 

 왜 은발의 푸른 눈을 한 저 소년을 화족(火族)이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손을 잡고 들어오는 소녀는 들러리처럼 고귀한 존재를 인도하고 있었다.

 

 족쇄를 하고 사슬을 끌며 움직이고 있지만 음산한 주변을 밝혀가며 움직이는 빛 그 자체였다.

 

 가까이 다가와 무릎을 조용히 꿇고 담담히 구경거리가 되어 주는 저 모습은 오히려 지켜보는 사람들의 경배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푸른 눈동자가 공작을 응시했다. 누구에게도 속박될 수 없는 자유로운 맑고 깨끗한 하늘 그 자체였다.

 

 세라는 공작이 검은 머리의 여자아이를 자신의 앞으로 세워 목을 쓰다듬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굴복하지 않던 푸른 눈동자가 땅으로 향했다.

 

 마치 저 소녀를 위해 자유를 포기하겠다는 듯.

 

 아론의 작은 어깨가 드러나고 파갈 가문의 소유를 뜻하는 백마 문양의 인장이 노예의 어깨에 닿으려는 순간에도 철없는 검은 머리의 소녀는 생글거리고 있었다.

 

 인장을 든 기사는 상처가 없는 부위를 찾아 결국 또 하나의 상처를 만들었다.

 

 고통을 이겨내려 이를 악문 채, 세라를 응시하는 푸른 눈과 마주쳤다.

 

 그 푸른 눈은 마치,

 

 

 ‘난 널 알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살을 태우는 냄새가 세라 속으로 들어오면서 메스꺼움을 느꼈다.

 

 중요한 자리이니 만큼 할아버지를 실망시킬 수 없었다. 그녀는 주먹을 쥐고 빨리 끔찍한 이 상황이 끝나길 기다렸다.

 

 특별한 노예를 소유하게 되었음을 경축하는 환호와 박수소리가 파갈성 곳곳으로 울려 퍼져 나갔다.

 

 그리고 사흘에 걸쳐 축제는 계속되었다.

 

 

 

 

 **

 

 

 

 축제의 마지막 날 저녁.

 

 파갈 공작은 세라를 집무실에 불렀다.

 

 

 “아론이 우리 가문에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겠지?”

 

 “황제만이 소유할 수 있는 전투노예를 할아버지께서 소유하게 되신 거잖아요.”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럼, 할아버지께서 나중에 황제가 되실 건가요?”

 

 

 세라의 당돌한 질문에 공작은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세라는 파갈공작을 닮아 냉소적이면서도 직접적인 질문을 내뱉곤 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한 질문이구나. 다만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은 큰 뜻을 품고 살기 바란다는 것이다.”

 

 “네.”

 

 

 세라는 할아버지의 말이 황제가 되고 싶다는 의미라 확신했다.

 

 

 “처음엔 노예의 선생이 될 수 없다고 길길이 날 뛰더니.”

 

 “어쩔 수 없잖아요. 외출금지에 제 모든 손님들의 방문을 막으셨으니까요.”

 

 “그만큼 가문을 위해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저는 고작 12살 이예요.”

 

 “간식도 같이 먹으면서 친하게 지내렴.”

 

 “무슨 말씀이세요? 친하게 지내라니요.”

 

 “다 알아 들었잖느냐?”

 

 “노예한테 제가 글을 가르치고 책도 읽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 망신을 어쩌나, 대책도 못 세운 마당에, 친하게 지내라니 너무 하세요!”

 

 

 세라의 격앙된 톤이 결국 들어나고 말았다. 파갈공작의 눈빛이 매섭게 올라갔다.

 

 

 “아론은 우리 가문의 최고 자산이나 다름없다. 가문 사람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가지는 것이 나중에 여러모로 유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이도 비슷한 또래이니 친해지기 쉬울 것이야.”

 

 “왜 하필 저인데요? 또래들은 잔뜩 있다고요.”

 

 “하나밖에 없는 내 손녀이기 때문이다. 다른 놈들에게 아론을 빼앗길 순 없어!”

 

 “하지만 노예랑 어울리…….”

 

 “세라! 더 이상 투정부리지 말거라. 너도 파갈 가문을 위해 네 몫을 해! 너는 영민한 아이니 할애비의 뜻을 잘 헤아리고도 남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가 보거라.”

 

 

 공작은 늘 세라를 어른처럼 취급했다. 아직 할아버지의 인자함과 따뜻한 사랑을 바라는 나이인데도 저런 식으로 여지를 주지 않았다.

 

 세라는 서운함을 누르고 돌아섰다.

 

 공작은 잠겨 있던 책상서랍을 열어 파갈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서를 다시금 손에 들었다.

 

 가문을 유지하고 번영시키는데 필요한 선조들의 정보들이 응집된 중요한 책이었다.

 

 그 안에 화족에 관한 정보가 짧게 있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화족. 태양 아래서 움직이는 불꽃처럼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 화족 남자의 뛰어난 전투력을 소유하고 싶다면 그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를 인질로 잡고 있으면 된다. 인질이 된 여자를 데리고 쉽게 도망칠 수 있으므로 단순한 인질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여자가 스스로 파갈을 떠날 수 없는 이유를 만든다면 화족 남자도 떠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철저한 사랑의 노예이기 때문에.]

 

 

 아론과 함께 발견 된 미하루를 조카들 중 하나에게 양녀로 들이도록 한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안심할 수 없었다. 미하루는 파갈 공작의 피가 흐르지 않았기에 완벽한 인질이 될 수 없었다.

 

 어린 아론이 미하루를 위한다고 해서 안심할 수 없었다.

 

 남자는 소년이 되고 청년이 되어 가면서 수없이 감정이 변할 수 있잖은가.

 

 공작은 아론이 파갈 성을 떠날 수 없게 할 족쇄가 필요했다.

 

 가문을 배신할 수 없는 완벽한 인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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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회상 - 환각일뿐이야! 2017 / 7 / 19 20 0 5464   
22 회상 - 납치 2017 / 7 / 19 17 0 5961   
21 회상 - 숨박꼭질 2017 / 7 / 19 24 0 5350   
20 그녀는 첩자가 확실합니다. 2017 / 7 / 18 18 0 7070   
19 영주님은 60대 노인? 2017 / 7 / 18 19 0 7228   
18 영주의 퇴폐미 2017 / 7 / 18 18 0 5118   
17 카라스 영주의 귀환 2017 / 7 / 18 19 0 5104   
16 세탁방 하녀가 된 세라 파갈 2017 / 7 / 18 21 0 7059   
15 초식동물에겐 버거운 임무 2017 / 7 / 17 23 0 6450   
14 회상 - 때려주고 싶은 여자 2017 / 7 / 17 17 0 6891   
13 회상 - 진창이 되어버린 머릿속. 2017 / 7 / 17 22 0 6445   
12 회상 - 축제, 감정…질풍노도의 시작 2017 / 7 / 17 18 0 7865   
11 회상 - 결혼할 나이 2017 / 7 / 17 19 0 8341   
10 죽음을 울리는 연주자 2017 / 7 / 15 26 0 7264   
9 세라 vs 금속이빨용병 2017 / 7 / 15 27 0 8469   
8 추격자들. 2017 / 7 / 15 22 0 6837   
7 늑대의 방문 2017 / 7 / 15 25 0 8469   
6 회상 - 귀족스승 노예제자 2017 / 7 / 15 28 0 7133   
5 회상-고통을 삼키는 조우 2017 / 7 / 15 25 0 8816   
4 회상-폭주의 시작 2017 / 7 / 15 27 0 7905   
3 카라스의 검은 기사 2017 / 7 / 15 28 0 94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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