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원은 새로운 드라마 시작 때문에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사전 제작 드라마라 대본은 반 이상 나와 있었지만,
장소가 완전히 섭외되지 않아 대본 내용을 조금씩 변경해가며 상황을 조절하고 있었다.
“이작가, 우리 이번에 부산에 내려 가보자.”
“무슨 일이십니까?”
“부산은 영화제 때문에 시에서 영화나 드라마 장소를 잘 섭외해 주는 모양이야. 또 영화인들 모임이 있는데 혹시 카메오 출연이라도 받아낼까 싶어서 한 번 참석해 보려고.”
“저도 같이 가야 할까요?”
“이작가도 같이 봐야지. 아무래도 드라마 흐름을 제일 잘 꿰고 있는 사람인데.. 왜 바빠? 지난 번에도 서울 올라오자마자 다시 섬에 가서 1주일만에 반쪽이 돼서 나타나더니..”
“아닙니다. 유명한 분들 사이에 끼이기가 부담스러워서 말입니다.”
“요즘 자기도 엄청 유명하던데 무슨 소리를. 하하하. 그럼 내일 아침에 첫 비행기로 내려갑시다. 내일 봐.”
뜬금없이 부산이다.
시인의 집이 부산에 있다고 들었는데..
작은 상자를 꺼내어 들고는 뿌듯한 웃음을 지었다.
시인이 좋아할까?
이 조그마한 상자 때문에 동원은 시인에게 연락 한 번 못했다.
이걸 구하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이상하게 시인을 생각하면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 가득 찬 감정이 꿈틀댔다.
억지로 밀어 넣고 못 나오게 막고 있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봇물 터지듯
무언가가 잔뜩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동원은 그 감정이 어떤 종류일지 몰라 매우 두려웠다.
그래서 애써 시인의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과 관련 된 어떤 말이 나올 때마다
곧바로 시인이 생각났다.
동원은 시인이 보고 싶었다.
“역시 여름은 부산이군. 공기 냄새가 다르네 달라.”
“박감독님은 바다 좋아하십니까?”
“엄청 좋아하지. 이작가는 별로?”
“좋아하죠. 섬사람인데요.”
“그래서 오늘 저녁 기대하라구! 유명인들이 많아서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빌린 모양이야. 맛집으로 소문난 집이라니까 부산에 온 만큼 해산물 원 없이 먹고 갑시다. 먼저 우리 드라마 장소부터 섭외 잘 해 보고!”
박감독과의 호흡은 꽤 좋았다.
작년에 극본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준 작품도 박감독과 함께였고,
직전 드라마인 ‘응답하라 도깨비야’도 박감독 작품이었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제작사에서 많이 기대를 하고 있었다.
사전 드라마라 동원은 더 부담이 되었지만
박감독이 그 긴장을 항상 풀어주고 있는 중이었다.
하루 종일 시공무원들과 이야기를 하느라 동원과 박감독은 녹초가 되었다.
그래도 좋은 장소를 섭외했고
시에서도 아낌 없는 협조를 약속해서 발걸음은 가벼웠다.
역시 영화의 도시다웠다.
“여기는 어딥니까?”
“엄청 유명한 초밥집인데 전국 3대 초밥집으로 유명하다는군. 예약한 손님이 아니면 대통령 할아버지가 와도 안 받아준다고 하더라고. 의외로 가격도 비싸지 않아 사람들이 예약하려고 인터넷에서 엄청난 경쟁을 해야 된다고 해. 이 모임도 한 달 전 총무가 직접 찾아와서 사장님 설득한 끝에 성사된 거라고. 오늘 우리가 통째로 빌렸으니 얼굴 걱정 없이 즐겁게 이야기하고 맛있는 초밥 먹읍시다. 하하하.”
박감독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가게로 들어가자 테이블이 모두 비어 있어서 둘은 깜짝 놀랐다.
요리사들이 요리를 하다 말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한 요리사가 나와서 안쪽으로 안내했다.
“모두 내실에 계십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 넓지 않은 가게였는데
안쪽으로 들어가니 넓은 방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시끄럽지는 않았으나 다들 이야기를 하느라고 열기가 후끈했다.
얼굴만 봐도 깜짝 놀랄만한 기라성 같은 배우들도 많이 있었다.
동원도 나름 드라마계에서는 자리를 잡았다고 하지만
차원이 다른 유명인들을 보니 입이 떡 벌어졌다.
유명 영화감독들도 많아 기대도 되었다.
동원과 박감독도 자리를 잡고 앉아 유쾌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어? 오늘은 만석 아니예요?”
“아니. 오늘은 단체 예약이라 다 안쪽에 있다. 저녁도 다 먹었는데 우리 공주가 웬일로 가게에 걸음을 하셨을까?”
초밥을 쥘 때는 언제나 근엄한 아빠지만 시인 앞에서는 딸바보 그 자체였다.
“아빠, 오늘 공주 술 한 잔 할라구요. 오늘 출석 연수 끝났는데.. 방학이 2주도 안 남았어. 흑흑흑. 1주일도 못 놀고 다시 섬에 가야해요. 넘 슬퍼서 술 먹어야겠어. 크크크. 나 여기 있어도 방해 안 되죠?”
“맨날 여기서 술 먹으면서 뜬금없이 왜 물어 보노? 우리 딸 술주정 받아 주는 게 아빠 기쁨이지. 허허허. 오늘 안주는 뭘로 드릴까?”
“오늘은 시원한 맥주를 먹을 거예요. 그래서 튀김이랑 매운 문어랑 맛있게 만들어 주세용.”
“특별식이니 돈을 두 배로 내라.”
무뚝뚝한 치수가 제일 먼저 문어를 손질하며 시인에게 말했다.
시인은 애교 있는 웃음을 흘리며 치수를 향해 대답했다.
“그면 새 언니 시집살이 시킬 건데?”
치수는 멈칫 하더니 조용히 주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기원이 오빠가 젤 바쁘네?”
“큰 손님 한 번 치러보라고 사장님이 특별 배려를 하셨지. 하하하.”
“그면 수철이 오빠도 오늘 초밥 쥐었어?”
“아니, 난 아직 통과가 안됐어. 흑흑흑. 그래서 내 배가 터질 지경이다. 실패한 초밥 내가 다 먹고 있거든. 시인이 너도 먹을래?”
“오빠! 난 아빠 초밥만 거의 30년이야. 오빠 초밥 못 먹을걸?”
“쳇. 듣고 보니 그렇네.”
시인은 홀짝홀짝 소리를 내며 천천히 한모금씩 맥주를 마셨다.
여기서 먹는 술이 세상에서 제일 편하고 제일 맛있었다.
시인은 일하는 오빠들과 아빠를 보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모두들 시인이 떠들던지 말든지 모두들 자신의 일을 하고 있었다.
맛있는 안주가 도착했다.
오늘은 치수의 배려(?) 덕분인지 특별히 더 매운 문어 무침이었다.
시인은 점점 취기가 올라 더 즐거워졌다.
“오늘 여기 우리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왜 그러세요?”
화장실에 다녀온 박감독이 자리에 앉으면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의아한 듯이 물었다.
“어떤 젊은 여자 한 명이 홀에서 술 마시고 있더라고. 여기 유명인들도 많은데 혹시 아는 척 하고 그러면 어쩌나 해서..”
“아.. 사장님 딸일 거에요. 안그래도 예약할 때 외부인은 절대로 받지 말아달라고 하니까 자기 딸이 가끔 와서 편히 술 한 잔 하는데 그건 이해해 달라구요. 걱정 마세요.”
“아하, 그렇구나. 참, 이감독, 지난번에 그 영화....”
동원은 슬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다.
이야깃거리가 조금 떨어지기도 했고,
낯선 자리에 오래 앉아 있으려니 지겨웠다.
박감독도 다른 감독들, 배우와 이것저것 이야기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단히 문자로 먼저 간다는 인사를 남긴 뒤 밖으로 나왔다.
“여기 나가는 문이...? 어? 시인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