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아무 감정이 없지는 않겠지. 싫어하는 마음이든 좋아하는 마음이든, 나를 향한 어떤 마음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같이 연주회를 보러 가고 전시회를 관람하러 갔으니까. 그렇다면 나를 향한 선배의 마음은 싫어하는 마음에 가까울까, 좋아하는 마음에 가까울까? 아마 좋아하는 마음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좋아하는 마음에 가깝다고 하더라도 그가 나를 좋아한다고 단정할 순 없다. 사람의 감정을 이분법적으로 나눌 수 없으니까. 두 가지 감정으로 사람을 재단한다면 재단되어버린 잘못된 감정으로 사람을 판단해버릴 게 뻔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감정과 싫어하는 감정 사이를 100으로 나눠서 판단했다. 그렇다면 선배는 아마 50을 기준으로 10 만큼 나를 좋아하는 감정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감정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저 선후배로서 느끼는 감정으로 봐야 할까, 썸을 타는 이성 간의 감정으로 봐야 할까.
전자가 가깝겠지만 나는 확신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나는 선배를 사랑하는 바람에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했으니까. 또한, 처음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껴본 터라 과거를 거울삼아 지금 상황에 맞는 답을 찾기란 불가능했으니까. 그래서 나는 확인을 해야했다. 그가 나를 이성으로 대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저 후배로만 대하는지를 말이다. 둘 중 어느 방향도 정하지 않고 계속 만나고 연락한다면 나는 사랑의 늪에 빠져 가슴앓이를 할 게 뻔했으니까.
[선배, 혹시 요즘 개봉한 액션 영화 알아요?]
같이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러므로 내 문자는 선배에게 내 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선배는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몇 분 후에 안다고 답장이 왔다.
[아는 지인에게서 받은 공짜 표가 있는데 같이 보러 갈래요?]
하지만 돌려서 말하든지, 직접 말하든지, 그를 사랑한다고 말하기 부끄러웠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공짜 표를 내세웠다. 계획에 없었던 공짜 표를. 처음에는 그가 내 마음을 알아차렸으면 좋겠다고 영화 보러 가자고 제안했지만, 한편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좋겠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나왔다. 그래서 내 마음은 상반된 감정으로 채워져 버렸다.
[제 친구들은 잔인한 액션 같은거 안 좋아하더라고요ㅠ]
선배는 내 문자에 또 고민하는지 옆에 숫자는 사라졌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답장이 올 때까지 다른 일을 할까 생각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답장이 왔기 때문이다.
[그래. 언제 보러 갈 건데?]
보러 가자는 그의 답장에 나는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기쁨과 행복이 담긴 비명을. 하지만 생각을 하고 지른 비명이 아니라서 얼른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근데 뭐 어때! 여긴 우리 집인데!'
나는 입에서 손을 뗐다. 나의 이상한 행동을 볼 사람은 아무도 없고 여기는 방음이 잘 되는 아파트였으니까. 하지만 이 기쁨을 환호성으로 표출하고 신이 난 얼굴로 방을 돌아다니기보다 꾹 참고 선배와 약속을 잡았다. 늦게 문자를 보내서 내 감정을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고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기 때문에.
'그런데 선배가 나와 함께 영화를 보러 간다면 선배도 내게 관심이 없지는 않겠지?'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지만, 호감은 있지 않을까 예상했다. 누가 관심 없는 사람과 함께 영화를 보겠는가. 비록 그를 사랑하는 마음이 보이지 않도록 공짜 표로 보호막을 한 겹 둘렀고 친구들을 언급하면서 두 겹 둘렀지만. 그래서 그가 내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동성도 아니고 이성이 같이 영화 보러 가자는데. 그렇다면 상대가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 거로 생각하지 않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선배는 그래도 나에게 호감이 있다고 추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보러 가자는 제안을 거절했을 테니까.
***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아서 우리는 영화관에서 만나기로 했다. 같이 영화관까지 가지 못해서 아쉬웠지만, 영화가 끝나고 선배와 함께 있으면 된다고 스스로 위로를 건넸다. 이번에는 연주회나 전시회와 달리 블라우스나 원피스를 입지 않고 꾸민 듯 안 꾸민 듯 청바지와 프린팅된 티셔츠를 입고 자켓을 걸쳤다. 하지만 향수는 여전히 뿌려서 엘리베이터 안은 은은한 향수 향이 퍼졌다. 그렇지만 코가 예민하지 않다면 못 맡을 냄새라 생각하며 선배가 기다리고 있는 영화관 로비로 갔다.
"선배."
선배는 의자에 앉아있다가 내가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동네 마실 나가는 차림일 줄 알았는데 저번보다 신경 쓴 듯한 선배의 옷차림에 나는 속으로 무척이나 놀랐다.
'물론 영화관이라서 세미 정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양호한데?'
"선배. 오늘따라 멋지네요. 저번에는 집 앞 편의점 가는 것 같았다면 이번에는 시내까지 가는 것 같아요."
"아, 그래? 그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선배는 내 농담에 피식 웃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나 보다. 저번보다 한결 부드러워진 걸 보니까. 그래서 나는 화기애애해진 분위기를 계속 이어가고 싶어서 무심한 듯 무심하지 않은 태도로 대화를 이끌어갔다.
"윤서야. 넌 영화 볼 때 팝콘 먹어?"
"네. 먹어요."
"그럼 내가 사줄게."
"엥? 안 그래도 돼요. 각자 내죠."
"아니야. 니가 표 끊었는데 내가 사야지."
영화 전까지 시간이 남았고 우리가 대화하던 곳은 팝콘 파는 곳 근처였기 때문에 팝콘 기계가 우리 눈에 띈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대화가 팝콘으로 이어졌고 결국 선배가 팝콘을 사기로 했다.
"무슨 맛 좋아해?"
"저 카라멜 좋아해요."
"그래? 나도 카라멜인데."
"정말요? 입맛이 같네요."
"그럼 카라멜 팝콘 추가해주세요."
팝콘은 기본보다 카라멜이 살짝 들어간 게 맛있었다. 나는 원래 달짝지근한 맛을 좋아하는데다 단짠의 조화는 환상적이니까. 그래서 나와 같은 선배의 취향에 괜히 들떴다. 그는 커다란 통에 든 팝콘 하나와 콜라 두 개를 샀다.
"그냥 큰 거 샀는데 괜찮으려나?"
"어, 어... 괜찮지 않을까요?"
이런 일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그저 팝콘 먹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서 다음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당황했다 뿐이지 싫지 않았다. 선배는 먹다가 서로 불편할까 봐 머쓱해했지만 나는 좋았다. 같은 통에 든 팝콘을 함께 나눠 먹는다면 손이 닿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그러면 우리 사이에 약하게라도 파란 불이 들어오지 않을까. 팝콘을 사느라 시간을 다 쓴 우리는 빠른 걸음으로 영화관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영화가 시작되지 않았는지 아직 광고가 나오는 터라 우리는 광고 불빛에 의존해서 자리를 찾았다.
"윤서야, 밑에 조심하고."
선배는 내가 어린아이같이 어두운 곳에서 넘어질까 봐 연신 뒤를 돌아봤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데. 하지만 이 걱정이 싫진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구름처럼 몽실거리고 따뜻해졌다.
'어두워서 다행이야.'
만약 어둡지 않았다면 내 얼굴에 지금 느끼는 감정이 모두 드러났을 테니까. 선배와 함께 찾은 예매한 자리에 앉고 옷을 정리하고 나니 화면은 비상문 위치를 안내하는 방송으로 바뀌었다. 이제 곧 영화가 시작하려나 보다. 영화관은 다시 어두워지고 이내 불빛 한 점 남아있지 않았다.
'...'
어두운 곳에 오래 있으면 눈이 익숙해져서 다시 윤곽이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옆에 앉은 선배는 처음에 보이지 않았지만 금방 흐릿한 윤곽으로 보였다. 그는 영화가 시작하기를 기다리는지 앞만 바라봤지만, 손은 팝콘에 가 있어서 그가 팝콘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도 팝콘을 먹으려고 손을 뻗었지만, 영화가 시작되어 다시 환해지는 바람에 서로의 손이 닿지 않게 피해버렸다. 하지만 영화가 나오는 동안 우리는 간간이 손을 부딪쳤다. 영화에 집중하느라 팝콘에 눈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손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함으로 약간의 그린 라이트를 기대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우리는 손이 닿으면 피하기만 할 뿐, 서로 보지 않고 영화에만 집중했다. 몇 번 닿은 손끝이 간지러웠지만, 그는 나를 보지 않고 끝까지 영화만 응시했다. 한 번이라도 나를 볼 법한데.
영화가 끝나고 선배는 약속이 있어서 바로 헤어졌다. 그래서 영화 끝나고도 함께 하고 싶은 내 바람이 이뤄지지 못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 내 바람이 일부 이루어졌는데 그 후로 우리는 가끔 문자를 주고받았기 때문이다. 비록 내가 먼저 보냈지만.
***
"윤서야 무슨 생각해?"
현의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몇 시지? 우리는 팝콘을 들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영화관 입구에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현은 심심한지 내게 말을 붙였고 나도 맞장구를 쳐 주었지만 머리는 이미 저 멀리 떠난 뒤였다. 그래서 내 멍한 눈을 눈치챈 현은 내게 무슨 생각하는지 물어봤다. 글쎄, 내가 무슨 생각 했더라.
"그냥. 부질없는 생각? 잘 기억이 안 나네."
"진짜?"
"... 2학년 들어서 처음 와 본 영화관이라 새삼 새로워서. 바뀐 곳이 없어서 옛 추억에 좀 잠겼지."
모두 부질없는 되새김질이지만. 그때 선배는 왜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을까. 누가 봐도 관심 있다는 태도 같았는데. 아무리 공짜 표로, 친구로 눈속임하려고 한다고 해도 인제 와서 생각해보니 다 티가 났었다. 애초에 이성과 영화를 볼 생각을 누가 하겠는가. 관심 있지 않는 이상. 그래서 애매모호한 감정 안에 약간의 불쾌함과 의문이 있어서 나는 얼른 추억을 털어내기로 마음먹었다.
"딱히 좋은 추억은 아니었어."
현은 뭐라 물어보고 싶었나 보다. 아니면 내 쓸모없는 추억을 안타까워하거나. 그는 눈썹을 축 늘어뜨려 내 마음을 위로했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위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얼른 이 주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팝콘 한 움큼 집어 먹었다.
"너도 먹을래?"
팝콘을 한 꼬집 집어 현에게 권했다. 그는 내 태도를 예상하지 못했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러니까 멍충미가 돋보이는 북슬북슬한 강아지 같아.'
나는 웃으며 그의 입에 넣어주려다가 내 입으로 쏙 넣어버렸다. 현은 이 또한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내 팝콘도 받아먹지 못했다. 그리고 영영 내가 주는 팝콘을 받아먹지 못했다. 내가 다시 팝콘 한 입 들었을 때 직원이 큰소리로 입장해도 된다는 안내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내 입에 팝콘을 쏙 넣어버리고 현은 허망하게 내 입으로 들어간 팝콘을 바라봤다.
"뭐해? 들어가자."
나는 그의 표정이 귀여워서 마지막으로 팝콘을 그의 입에 꾸욱 넣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잘 받아먹었지만 그의 얼굴은 아까와 다르게 붉어졌다. 마치 앞에 놓인 빨간 버튼 같아서 그의 볼을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싶었지만 대신 손가락을 꾸욱 눌렀다. 손가락은 그의 빨간 버튼 대신 내 마음을 눌렀는지 마음이 두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