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그 질문에 대답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요"
얼굴에 표정을 싹~지우고 지담은 차분히 입을 열었다.
봉사활동 얘기를 하다가,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지담은 이 남자가 이상했다.
-혹시 겉만 멀쩡하고 정신적으로 이상한?...에이~설마-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데,
"아~이거 너무한데요? 난 졸지에 성질이 더럽고, 까칠하고 심지어 싸가지도 없는 사람이라고 까지 들었는데, 남자친구 있는지 없는지 정도는 말 해줘도 될 것 같은데... 안 그런가요?"
강현의 말에 지담은 움찔했다. 세윤의 충고대로 좀 참을걸...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자꾸 남의 남자친구에게 관심을 가질까?
-나한테 관심이 있는 건가? 그건 싫은데...-
그러고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여과 없이 내뱉는 지담이었다.
방금 후회까지 했으면서.....
"남자친구가 있든 없든 이 선생님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왜 자꾸 남의 남자친구에게 관심을 가집니까? 혹시 성향이 그 쪽..."
여기까지 말하는데 강현이 말을 잘랐다.
"서지담씨, 지금 무슨 상상을 하는 겁니까? 전 여자를 좋아합니다."
귀가 빨개진 강현은, 도대체 자신이 왜 이런 변명까지 해야 하는지 모를 일이었다.
"아~네~ 하하..." 지담은 아차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또 생각하지 않고 나오는데로 지껄인 자신을 마음으로 탓하는 그녀였다.
엉뚱한 건지 둔한 건지... 이 여자 아까부터 자신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예상을 뛰어넘는 질문을 하는 탓에 식은땀이 절로 흐르는 강현이었다.
지금까지 타인에게 이렇게 휘둘린 적이 있던가? 참 낯선 상황이었다.
지담에게서 더이상 이상한 질문이 날아오기 전에 강현은 직구를 던지기로 했다.
"그리고 서지담씨가...지금 남자친구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지담의 휴대폰이 울렸다. 수훈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지담은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왜.."
지담의 첫마디에 수훈은 기분이 언짢았다.
<"우리가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연락하는 사이야? 지금 어디야... 잠깐 볼 수 있어?">
"지금 일 때문에 밖에 나와 있어서 길게 통화못해. 주말에 가게로 갈께"
<"알았어">
통화를 짧게 끝낸 지담은 곧바로 강현에게 말을 했다.
"그게 무슨 뜻이죠? 남자친구가 없으면 좋겠다니..."
어렴풋이 들려오는 통화 목소리가 남자임을 눈치챈 강현은,
-설마 진짜 애인이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한 강현은 가슴이 저릿함을 느꼈다. 그래서 더욱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제가 서지담씨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지담은 아까보다 눈이 더 커졌고 할 말을 잊은 체, 입을 다물지 못했다.
머릿속이 한 순간에 복잡해진 지담은,
-그러니까 이 남자 봉사활동은 핑계고, 나 때문에?-
이건 아니길 바란 지담은 그를 쏘아보며 입을 열었다.
"순수한 의도로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건 아니었네요"
"봉사활동도 하고 싶었고, 서지담씨를 더 알고 싶은 것도 진.심. 입니다"
강현은 진심이라는 말을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지담에게는 아무 의미 없었다.
"제가 이 선생님께 무례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 사생활과 관련된 질문은 더이상은, 사양하겠습니다. 봉사활동에 관한 건, 내일 과장님께 보고하고 연락드리죠"
수훈이 말한 철벽 지담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무적이고 싸늘한 그녀의 모습... 세윤은 그 모습을 늘 안쓰러워했다.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런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지담은 꾸벅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와버렸다. 강현도 얼른 뒤따라 나왔지만, 식당 아주머니와 다정하게 인사를 하는 지담을 보고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도통 떠오르지가 않았다.
그리고 나온 말이...
"계산은 제가 하겠습니다" 였다.
"아니오, 제가 먹고 싶어서 먹은 거였고, 우리 복지관에서 봉사활동을 하실 수도 있는 분에게 제가 사드려야죠"
점점 지담의 말투가 싸늘하게 변해가는 걸 느낀 강현은 당황스러웠다.
"이모, 나 갈께"
"그래 조심히 가...잘 생긴 총각.. 총각도 다음에 또 와~알았지?"
지담을 뒤따라 나가려는데, 아주머니가 말을 건넸다.
"네, 그럼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하고 곧장 나왔는데 지담이 보이지 않았다. 식당 주변을 다 찾아보았지만 지담은 없었다.
조바심도 나고 갈증도 났다. 이런 생소한 감정은 낯설고 이해가 가지 않는 강현이었다.
"젠장"
낮은 음성 사이로 짧은 욕짓거리가 나왔다. 답답한 넥타이를 조금 풀어 헤친 강현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러나 끝내 통화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녀가 받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래도 내일, 연락을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그는 집으로 향했다.
그 시각 지담은 집이었다. 사실, 식당 옆 원룸이 자신의 집이었다.
그를 일부러 피하기 위해 집으로 냅다 뛰었다.
씻지도 않고 침대에 몸을 맡긴 지담은, 요즘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랜 친구가 느닷없이 고백을 하질않나, 또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가 관심 있다고 하질 않나.... 서지담, 남자 복이 터졌구만...
지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푸닥거리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생각 같아선, 그 남자에게 봉사활동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라고 하고 싶지만,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매정하게 대할 수도 없고, 보나 마나 과장님은 허락할 게 뻔하고....
지담은 머리가 지끈 아파 오는 걸 느꼈다.
-다음날
아침 회의를 마치고, 지담은 치과의사 이강현이라는 사람이 의료봉사활동을 복지관에서 하길 원한다고 보고를 했다.
과장은 지담의 예상대로 흔쾌히 받아들였고, 보고서 및 프로그램을 작성해서 제출하라고 했다.
지담은 매월 둘째 주 토요일에 세윤과 같은 시간에 진료를 보도록 프로그램을 작성했다.
세윤도 이곳 복지관에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한의사인 그녀 덕분에, 그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사람이 지담이었다.
이제는 그에게 연락을 해야 한다.
영원히 이 순간이 안 왔으면 하는 바람이 굴뚝같지만, 일은 일이기에...
잠시 머뭇거리던 지담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과장님이 승인하셨습니다. 매월 둘째 주 토요일 오전10시~12까지입니다. 30분정도 일찍 오셔서 진료 준비를 하시면 됩니다. 시간이 맞지 않으시면 다시 조정하겠습니다. 연락 주십시오]
통화 연락을 기다렸던 강현은, 지담의 사무적인 메시지를 읽고, 얼굴이 굳어졌다.
그리고 이내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무리 기다려도 그녀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