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쪽이 왜 여기에..."
"와, 여기서 만날 줄이야! 오랜만이에요."
오랜만이란 인사와 함께 눈을 살포시 접어 내리는 이 남자.
붉은 재킷과 스모키한 화장으로 짙은 수컷의 향기를 내뿜는 이 남자.
나는 익숙하면서도 생소한 얼굴을 한참 동안 뜯어봤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지천으로 깔린 이 얼굴을 못 알아볼 리는 없었다.
"도준, 아는 분이야?"
"My Real Spain 통역 선생님이세요. 여기 우리 매니저 형이 최성진 씨예요."
"아, 그랬군요."
그가 여기 있다는 것은 이곳에서 SOUL의 공연이 있다는 말이네. 그래서 밖에 여자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구나. 이제야 이해가 되네.
혹시 사람들이 알아볼세라 우리 세 사람은 서둘러 양손 가득 간식 상자를 쌓아 들고 복도를 걸었다.
힐끔힐끔, 도둑 눈길로 올려다본 그는 과연 색달랐다.
붉은색 라이더 재킷과 스모키한 화장은 그의 천진한 얼굴을 가리고 날카롭고 강한 남자의 면모를 살려냈다.
특히 재킷 안의 얇은 검은색 면티는 그의 단단한 몸에 달라붙어 야한 상상력을 자극했다.
길쭉한 다리를 매끈하게 감싼 블랙진은 당장에라도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것처럼 날렵했다. 화룡점정으로 메탈 액세서리까지.
이건 뭐 섹시를 넘어서 퇴폐미까지 넘보겠는데? 뭐, 귀여운 쪽이 내 타입에 더 가깝긴 하지만, 이것도 나름대로 여자 가슴에 불 지를만 하겠어.
그때 나의 눈길을 느낀 그가 미소 띤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덕분에 나는 도둑질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흠칫 놀라 상자에 코를 박고 말았다.
"아야야..."
"괜찮아요? 코 빨개졌어요."
"으아."
이런,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해 가릴 수도 없다.
울상인 내 얼굴을 본 밀가루가 고개를 쳐들고 푸스스 웃음 가루를 흘린다. 아, 저 얄미운 목울대를 손날로 쳐버리고 싶다.
"그만 웃어요."
나의 뾰족한 말에 뚝, 웃음을 그친 그가 다시 한번 생글생글한 얼굴을 나에게 돌리고 물었다.
"우리 프로그램 보셨어요?"
"네."
"같이 노래 부른 것도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화투만으로도 충분하네요."
설마 그 장면이 나올 줄이야. 어리바리한 얼굴로 패 잡을 줄도 몰라 두리번대는 나를 보며 진해온 그 녀석이 얼마나 웃어젖혔던지.
그것도 장장 10분이나 나왔다고! 당사자의 의견은 묻지도 않고서! 장 PD님한테 전화해서 출연료 내놓으라고 해야지, 안 되겠어.
"그나저나 스태프가 400명이라니. 대단하네요."
"아, 이거 스태프들이 먹을 거 아니에요."
"응? 그럼 누가..."
"글쎄요. 누가 먹을까요?"
"뭐예요. 빨리 알려줘요."
나에게 향했던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뜸을 들인다. 뭐가 재밌는지 콧노래까지 부른다. 뭐야, 뭔데? 난 궁금한 건 못 참는 성격이란 말이다!
나는 저만치 높이 올라간 그의 얼굴을 보기 위해 상자 위에 턱을 얹었다. 그 역시 답을 주기 위해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만의 달달하고 시원한 비누 향이 우리 사이의 공기로 스며들었다.
"혹시 역조공이라고 들어보셨어요?"
"역조공?"
"이건 우리 멤버들이 팬미팅에 온 분들한테 선물하는 거예요."
"아하, 역조공!"
"며칠 전에 라희가 맛있는 업체를 발견했다고 추천해줬는데, 선생님이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팬들을 위한 선물이었다니. 팬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참 기특하다.
만약 내가 상자를 들고 있지 않았더라면 우리 과외 학생에게처럼 궁디팡팡을 해줄 뻔했다.
짙은 눈매가 만들어낸 차가운 분위기와 달리 봄바람처럼 따스한 웃음을 흘리는 그의 기분이 그 어느 때보다도 좋아 보인다.
"팬들한테 줄 선물 때문인가? 기분 좋아 보여요."
"네, 좋아요.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가 다시 한번 눈꼬리를 살랑인다. 스모키화장으로 무서운 얼굴을 하고 웃는데 전혀 위화감이 없다는 게 나는 더 무섭다.
그나저나 120인분이 담긴 상자들을 잡는 손이 자꾸 미끄러진다. 읏차, 이거 은근히 무겁네. 앞으로 대량주문은 해온이 녀석도 데리고 와야겠어.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상자를 얼굴까지 들어 올리며 손을 고쳐잡았다.
별안간 비누 향이 코끝을 스치더니 눈앞의 상자 하나가 사라졌다. 눈으로 저절로 움직이는 상자를 따라가니 커다란 손 하나가 상자를 제 몫 위로 얹는다.
에구, 자기 것도 무거울 텐데. 덕분에 나는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커다란 손의 주인이 나를 내려다보며 한쪽 눈을 찡긋한다.
"사실은 선생님을 만나서 좋은 거예요."
"빈말이라도 고맙네요."
"나 빈말 못하는 성격인데."
그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코를 찡긋한다.
그래그래. 네 맘 다 안다. 역시 연예인은 사회생활을 잘한다니까.
우리는 간식 상자를 대기실로 옮겼다. 상자를 내려놓자마자 스타일리스트들이 기다렸다는 듯 밀가루를 둘러싸 거울 앞으로 데려갔다.
내가 최성진 씨와 이야기하는 동안 붉은 재킷의 사나이는 스타일리스트들에게 둘러싸여 핀마이크를 점검하고 있다.
동시에 옆에 선 무대스태프와 동선과 조명 위치를 하나하나 점검하며 꼼꼼히 살핀다. 볼리비아나 스페인에서의 맨송맨송한 밀가루와는 다른 예리하고 날카로운 눈빛.
무대 뒤에서도 저렇게 카리스마가 넘칠진대, 무대 위에서의 문도준이란 사람은 어떤지 궁금해졌다.
내가 아는 누구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굿바이 인사를 전하기도 어색하네.
"진해연 선생님!"
조용히 문을 닫고 나오려는 나를 그가 큰 소리로 불렀다. 그리고는 사람들 머리 위로 손을 뻗어 휘휘 젓는다.
그래도 저 빙구 웃음은 밀가루 맞네, 맞아.
*
최성진.
부르르, 진동과 함께 액정화면에 익숙한 이름이 뜬다. 동시에 나의 내면에서는 심각한 내적 갈등이 벌어진다.
이걸 받아, 말아?
"전화 안 받고 뭐 해?"
"어, 그냥."
"최성진이면 그 대량주문? 자주 시키네."
그러게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안 받고 싶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이 사람에게서 전화가 온다. 가게를 연 지 두 달이 채 안 됐는데 이 사람 이름으로 온 주문만 벌써 6건이다.
대량주문은 좋지. 하지만 또 직접 와달라 하겠지. 아놔, 우리 가게가 강서구에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직접 오라고 하는 거냐고. 이 정도면 진상 아냐?
"해든 세트로 100인분. 맞으시죠?"
-맞습니다. 혹시 저번에 주신 차를 1인분만 따로 주문할 수 있나요?
"차는 서비스로 드려요. 그럼 이번에도 차가운 모과차로 더 드릴까요?"
-네. 그런데 이번엔 좀 멀어요.
최성진이란 이름으로 주문하는 메뉴는 대부분 우리 가게에서 가장 비싼 것들이다.
그래. 양으로 보나 가격으로 보나 슈퍼 갑에 해당하는 손님에게 찾아가는 서비스 정도는 해드려야겠지.
서울에서 촬영하는 장소가 다들 거기서 거긴데, 멀어봐야 얼마나 멀겠어.
자신을 다독인 나는 다시 한번 비즈니스 미소를 장전했다.
"어딘데요?"
**
"미친 문도준!"
강릉? 강서구도 아니고 강르으응?
네 놈이 진짜 미친 게지? 지금 네 놈 때문에 내가 세 시간째 운전대를 잡고 있단 말이다. 아오, 이 자식을 진짜!
"아빠는 왜 하필 오늘 허리가 아픈 거야!"
분기충천한 나는 다시 한번 운전대를 고쳐잡고 7년의 운전경력 중 가장 빠르고 거친 운전스킬을 시전해 강릉의 해수욕장으로 내달렸다.
"오셨어요?"
"아니, 지방까지 직접 오라는 건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아이, 그래서 교통비까지 넉넉히 입금해드렸잖아요. 그럼 어찌합니까? 여기가 제일 맛있다는데."
차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달려온 성진 씨가 얼른 트렁크를 연다.
볼 때마다 느끼지만 이 매니저는 성격이 참 좋단 말이야. 사근사근한 그의 웃음을 보자 세 시간 동안 솟구친 분노 게이지가 차츰 가라앉는다.
얼굴도, 손도, 심지어 허리까지 동글동글한 인상의 성진 씨는 고생한 나는 가만히 있으라며 100인분의 도시락이 담긴 상자를 혼자서 꺼냈다.
"문도준씨 도시락은 따로 표시해뒀어요."
"제가 다 같은 거로 주문하지 않았던가요?"
"오늘 메뉴에는 새우튀김이 있거든요. 전에 알레르기 있다고 했던 게 기억나서 다른 거로 바꿨어요."
겨우 와인 한 잔에 취해가지고는 입을 댓 발로 내밀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던지던 그의 발가스름한 얼굴은 잊히지 않는다.
투덜투덜, 어린애처럼 찡찡대던 그 와인 숙성 호빵 말이지.
성진 씨가 휘파람을 불며 두 개의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센스가 장난 아니시네요."
"고객 맞춤 서비스에 이 정도는 기본이죠."
"이러니 안 반하고 배겨?"
성진 씨가 트렁크 문을 닫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럼 그럼. 우리의 고객 만족 서비스가 얼마나 감동적인데. 덕분에 지금까지 주문을 안 한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주문한 사람은 없단 말이지.
이후로도 성진 씨가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너무 작아 알아듣기는 힘들었다. 트렁크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바로 운전자석으로 돌아왔다.
"오신 김에 촬영장 구경하고 가세요. 곧 있으면 도준이도 끝날 거예요."
"아뇨. 얼른 가봐야죠."
"인사라도 하고 가세요. 안 그럼 서운해할 거예요."
우리가 그럴만한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길 막히면 답도 없으니 그냥 가야지.
하지만 성진 씨는 막무가내였다. 다짜고짜 자동차 시동을 꺼버린 그는 차 열쇠를 아예 자기 주머니에 넣어버렸다.
그리고는 밀가루와 함께 와야 열쇠를 돌려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손수레와 함께 사라졌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우, 햇빛."
성진 씨에게 등 떠밀려 도착한 해변에서는 드라마 촬영이 한창이었다.
오후 2시가 지났는데도 태양은 머리 위에서 작열하는 것도 모자라 푸른 바다에까지 제 흔적을 흩뿌리고 있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하늘은 짙푸른 색의 하늘과 대비를 이뤘다. 자잘하게 부서지는 파도가 만들어낸 하얀 거품은 마치 태양이 바다 위에 뿌린 보석을 모두 쓸어온 듯 새하얗게 빛났다.
"저기 있네. 밀가루."
구경하는 사람들 틈으로 조그맣게 밀가루의 얼굴이 보인다. 별다른 꾸밈 없이 말끔한 와이셔츠와 청바지만 입은 그는 하늘과 바다, 파도가 만들어낸 배경과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맞은편에 선 여배우를 응시하고 있다. 한껏 좁힌 미간, 차가운 눈빛, 그리고 미동 없는 고개가 극 중 남자의 기분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시린 태양 빛과 닮아 차갑게 날이 선 그의 표정을 바라보는 내가 다 마음을 졸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의 얼굴이 어찌나 뽀얀지 반사판을 댄 여배우와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여자마저 굴욕 시키는 이기적인 외모란 게 저런 건가?
"문도준."
하늘에서는 태양이 이글거리는 얼굴을 하고서 그 누구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작열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서 지지 않고 서 있는, 태양보다 빛나는 남자. 문도준.
당신은 어떻게 저 잔인한 태양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가 있지? 어떻게 저 거대한 태양보다 더 빛날 수가 있는 거지?
나는 지금도 숨이 막혀 타들어 갈 것 같은데. 이렇게 수많은 사람 속에 숨어있지 않는다면 내 존재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데.
당신은 그때의 나와 같은 상황을 맞닥뜨려도 지금처럼 당당하겠지?
"만약 그때 내가 당신을 만나 태양 앞에 맞서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지금쯤 이렇게 숨어 지내지 않아도 됐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