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세월도 갈 길을 따라 가던 중 5월에 머물렀다. 그 사이 수경이는 근수 말대로 3년의 세월이 번개처럼 간다는 말에 위기를 느끼고 공부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근수는 군대라는 피신처 때문인지 시간의 여유가 많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수경이던 수현이던 그들에게서 충족하지 못한 해갈을 다른 여학생들과 즐기고 싶어 안달이 난 놈처럼 난잡한 학창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수경이는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유는 단지 시험을 치고 난 뒤의 결과 때문이었다. 허구한 날 보이지 않는 이유가 자취방에 쳐 박혀서 공부만 하는 줄 알 정도로 성적이 좋아서 수경은 근수의 문란한 생활에 대해 상상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근수 자취방에서 같이 공부할 생각 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수현인지 수경인지도 헷갈리고 있는 놈과 단둘이 자취방에 머무는 날이 많아질수록 누가 먼저라고 할 것이 한번은 분명히 뜨거워 질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때! 절정의 흥분에 도달했을 때, 그의 입에서 무심결에 수현이란 이름이 나오면 어떡하나? 초라함은 당연하겠지만 아마 미쳐버릴 것이다. 평생을. 그게 가장 두려웠던 수경은 근수의 자취방에는 아예 가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최루탄 가루가 정문을 점령하고 있는 전투경찰보다 더 많이 도서관을 점령할 때였다. 여기저기에서 난리가 나고 있었다. 전경들이 도서관으로 진격 중이라고 했다. 수경은 거의 혼비백산이 돼 도서관 출구를 향해 달려 나갔다. 앞에서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게 했던 친구와 선배들이 데모대열과 함께 도서관으로 피신해 몰려 오고 있었다. 그러나 수경은 그들을 외면했다. 그들과 같은 대열이 아니란 걸 강력하게 피력하듯이, 전경들이 오해할 정도로 전경들을 향해 돌진했다. 천만다행히 몇몇의 전경들이 데모하는 자와 도망치는 자를 구분은 하고 있었다.
계단에서 미끄러져 굴러 내려가다가 머리가 깨지거나 불행히도 죽어도 좋으니 최루탄만은 피하자는 마음만으로 도망치다가 멀리 정문에 있는 시커먼 대열을 보고 멈췄다. 그들은 완전 무장한 전투경찰이었다. 방금 피해 왔던 전투경찰의 서너 배는 더 버티고 서 있었다. 과연 저들이 샛길로 나를 보내줄까? 만약에 비켜주더라도 그 옆으로 지나칠 자신이 없었던 수경이 근수가 늘 다니는 개구멍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탱자 가시를 피하려고 몸을 잔뜩 웅크려 개구멍으로 들어가버리면 그만 인 것을! 수경이의 머리가 무심결에 데모대열 쪽으로 돌아갔다. 그때 놀라운 광경을 보고 말았다. 근수가 어떤 여학생에게 귀싸대기를 수도 없이 맞으면서도 그녀를 울러 매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광경도 광경이지만 정말 무서운 여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수경은 잠시 넋을 잃고 서 있다가 그쪽으로 서서히 가고 있었다. 마치 팔을 걷어붙여 여학생의 멱살을 붙잡아 흔들며 근수를 도와주기라도 하듯이 서서히 근수 근처까지 갔다가 앙칼진 소리에 걸음이 멈춰야 했다.
“야! 네가 왜 이렇게 비겁하게 변했어? 저 친구들 안보여? 이거 놔!”
옥신각신 하다가 여자가 근수 어깨에 둘러메져 버렸다. 여자는 내리려고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때 이수경은 김근수 어깨에 무거운 짐처럼 올려져 있는 사람이 이수현임을 알았다. 내려달라며 앙탈을 부리던 도중에 서로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여자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그들의 몸짓은 자매나 부부처럼 수경의 눈에 들어왔다. 전쟁터에서 아내나 여동생을 먼저 살리려고 목숨을 바치는 남편이나 오빠 같은 광경을 연출하는 그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이수경은 홀로 버려진 외톨이가 된 기분도 느끼고 있었다.
몸부림을 치면서 떠들어대는 이수현이라는 여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이수경의 몸에서 소름도 오싹 돋았다. 서울에서 이 시골대학까지 쫓아온 그녀는 세상을 바꾸려는 친구와 선후배를 도우려고 왔다. 그런데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는가? 최루탄을 피해 도망치는 중이다. 자괴감이 들기도 전에 이수현과 이수경에 대한 비교가 앞서고 있었다.
이수현과 이수경의 다른 점은 이름 끝뿐인데 뭐가 다른가? 근수가 나를 단지 친구로만 여기고 단 한번도 여자로 여기지 않던 이유가 저거였나? 저렇게 당돌한 여자를 좋아했나? 몸가짐이 헤픈 날라리 여자들만 쫓아다녔지 않았나? 그래서 나도 그런 척을 했는데 저런 과격한 여자를 좋아했나?
눈처럼 날리는 최루탄 속에서 수경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여기까지 뿐이었다.
그는 다시 수현이가 옴짝달싹 못하게 끈으로 묶듯이 양팔을 묶어 어깨에 울러 맸다. 그리고는 그가 늘 도둑고양이처럼 기어 다니던 탱자나무울타리 쪽인 수경이가 서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그런데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수경이가 빨리 도망칠 수 있게 길을 터주는 것처럼 근수에게 쫓아가 근수가 울러 맨 수현이 엉덩이를 밀고 있었다.
“빨리! 빨리”까지 하면서 바둥대는 수현이 뒷발에 차이기까지 하면서 밀고 있었다. 그때였다. 여학생 한 명이 쫓아와 도망을 못 치게 앞을 가로막았다.
“야! 이 비겁한 새끼야! 그 언니 안 내려 놔!”
그 애였다. 반말하지 마라며 당돌하게 노려보던 정외과 새내기였다. 처음으로 수경이는 근수도 욕을 할 줄 아는 친구란 걸 알았다.
“야 이! 씹할 년아! 저리 안 비켜! 개 씹 같은 년이 끼어들어. 저리 비켜! 씹할 년아!”
그런데 이상했다. 당돌했던 여학생이 아닌 막내둥이 여동생 같았다.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입을 막고는 어리벙벙한 상태로 울먹이고 있었다 오빠가 어떻게 나한테 그런 말을? 그런 표정이었다.
근수 눈만 보고 있었다.
그렇던 말던 근수가 외면해버리고 수현이를 울러 매고 울타리 근처로 갈 때 뒤에서 ‘악!’하는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 여학생이 전경들의 곤봉에 어깨를 살짝 비켜 맞았지만 기절해 버렸다.
그런데 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근수 몸이 꿈틀하고 있었다.
“저 개새끼가!”
지금까지 전경에게 한번도 달려들지 않았던 근수가 수현을 내려놓고 전경들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수현도 기회는 이때다! 하듯이 김근수 뒤를 따라서 전경들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수경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지켜볼 뿐이었다. 근수가 잠시 멈춰 무릎을 꿇고 앉아 여학생을 살피고 있었다. 머리를 흔들며 뭐라고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너무 멀리 있어서 수경에게는 들리지는 않았다. 수경이 생각에는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확인하는 과정 정도로만 보였다.
확인을 마친 김근수의 발이 하늘을 향해 날고 있었다. 축 쳐져 늘어져 있던 여학생의 신경을 살릴 정도로 신기한 광경이었다. 여학생이 몸을 꿈틀하며 김근수 쪽으로 몸을 비틀고 있었다. 하늘을 나는 김근수를 보면서 저 애가 무슨 마력을 썼나? 어떻게 저렇게 날아다니지? 이수경이 여학생을 쳐다봤다. 뒤통수가 움직이는 대로 근수가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