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야는 몇백 년이 지났는데도 ‘그날’을 잊지 못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그가 집행관들에게 양팔을 잡힌 채 연행되던 모습을. 그의 흰 날개 한 쌍은 축 처진 채, 바닥에 질질 끌렸다. 꿈속의 엘리야는 울면서 그를 쫓아가려 애를 쓰다가 눈을 떴다.
“헉-”
꿈에서 깬 엘리야는 다음 날이 새로운 파트너를 만나는 날인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자신에게 새로운 파트너가 배정될 때마다, ‘그날’의 악몽을 꿨기 때문이었다.
“하… 어차피 자기는 글렀군.”
엘리야는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짐을 싸기 시작했다. 휴가의 마지막 날 밤이었지만, 이 악몽을 꾼 이상 그녀는 자신이 다시 잠들 수 없음을 알았다. 그녀는 날이 새는 걸 기다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걸 택했다.
그것이 엘리야가 도착 예정일보다 빨리, 지금 자신의 기숙사에 도착한 이유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려는 키리안을 마주쳤다.
*
“일단 우리 거실에서 이야기할까?”
엘리야의 연락을 받고 온 비비안은 천사 · 악마 중재팀 부서의 팀장이었다. 그녀는 갑작스러운 연락에도 당황하지 않고 레몬 빛 눈동자를 휘며 미소를 지었다. 그나마 비비안이 오자, 키리안과 엘리야 사이에 얼어붙어 있던 공기가 조금이나마 풀렸다.
비비안은 거실 소파에 앉아 서로 멀리 떨어져 앉은 엘리야와 키리안을 살폈다. 엘리야는 무표정인 채로, 키리안은 눈치를 보며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금빛 머리칼을 뒤로 넘기며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일단, 엘리야가 이렇게 빨리 오게 될 줄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엘리야 휴가는 잘 보냈어?”
“그냥…… 별일은 없었습니다.”
비비안으로서는 분위기를 풀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하지만 엘리야의 단답형에 분위기는 더욱 어색해졌다. 비비안이 엘리야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살피며 말했다.
“급하게 올 줄은 몰라서……. 피곤하지?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아, 아닙니다. 그저 이상한 꿈 때문에 잠을 설쳐서요.”
“휴…… 원래는 내일 정식으로 다 설명하려고 했는데,”
비비안은 이제 슬슬 본론을 말하기로 했다.
“서로 이미 들어서 알 거로 생각해. 이쪽은 천사 중에서 실적 1위를 내는 키리안, 이쪽은 악마 중에서 실적 1위를 내는 엘리야. 둘이 파트너로 활동하게 되었어. 회사는 양측 진영의 실적 1위끼리 선의의 경쟁을 하길 바라.”
엘리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비안은 그 뒤 숨을 한번 크게 내쉬고는 결심했다는 듯이 말했다.
“지금 이 상황이 초래된 건……. 엘리야와 키리안이 파트너로 지내는 동안 둘이 합숙하라는 명령이 위에서 내려왔기 때문이야.”
“합숙이요?”
키리안이 놀라기도 전에 엘리야의 입에서 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엘리야는 아까의 조용한 모습과는 달리 격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요즘은 합숙이라는 방침이 거의 사라진 거로 알고 있는데요. 제 기수까지만 합숙하고 이젠 그 제도 완전히 사라진 거 아니었나요?”
비비안은 침착한 태도로 엘리야를 달래려고 노력했다.
“엘리야 네 말이 맞아. 그런데 그동안 엘리야의 전 파트너들이 줄줄이 파트너를 바꿔 달라고 요청한 일이 있었잖아?
이러면 안 되겠다 싶으셨는지, 파트너십 좀 기르라고 위에서 그렇게 명령이 내려오더라고.”
엘리야는 눈 위에 자신의 손등을 올리고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그 윗분이 내리는 결정은 마음에 들어본 적이 없어.”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은 비비안의 눈치를 살폈다. 만약에 방금 엘리야의 말을 대천사 미카엘이 들었다면 호통이 가장 먼저 떨어질 일이었다. 다행히 비비안은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엘리야가 급하게 말했다.
“저, 이 방침 취소될 수 없을까요? 파트너십 유지해보려고 노력할게요.”
엘리야의 단호한 말을 들으며 키리안은 민망한지 무릎 위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그리고 비비안은 키리안의 그런 손짓을 놓치지 않았다. 그동안 파트너에게 철저하게 선을 긋는 것으로 유명한 키리안이었다. 비비안은 키리안의 반응을 보며 속으로 앞으로 재밌어지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매우 유감이라는 듯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엘리야, 위에서 내려온 명령이면 일단 합숙을 하긴 해야 할 거야. 대신에! 딱 한 달만 같이 살아보라고 하셨어. 한 달만 잘 버텨주면 그 뒤에 내가 보고 올릴게.”
엘리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비비안은 엘리야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했다. 와중에 엘리야는 속으로 비비안이 보기 드물게 친절한 천사라고 생각했다. 본래 악마 사원의 의견은 잘 무시되기 일쑤였다. 엘리야는 표정을 애써 풀고 비비안에게 말했다.
“일단, 알겠습니다.”
그 말을 듣자 비비안의 얼굴이 마치 구름에 가려진 해가 나오듯 순식간에 밝아졌다. 비비안은 키리안의 등을 치며 명랑하게 말했다.
“키리안, 엘리야에게 잘해야 한다!”
그리곤 엘리야를 향해 돌아보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야, 키리안이 못되게 굴면 나한테 바로 말해.”
그 말을 듣고 엘리야는 양 입꼬리만 당겨 겨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일단 둘이 쓸 방엔 다 개인 욕실이 딸려 있고, 원하는 대로 각자의 방에 경계 사이렌 마법을 설치해두면 좀 더 편하게 지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키리안 미안하지만 잠시 자리를 피해줄 수 있을까? 내가 엘리야한테만 할 말이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키리안이 자신의 방에 들어간 걸 확인한 비비안은 거실에 마법을 걸어두었다. 마법을 친 공간 밖의 사람에게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소리 차단 마법이었다. 비비안은 엘리야의 두 손을 꼭 잡고 말했다.
“엘리야, 그러고 보니 새로운 ‘헬퍼’를 찾아볼 생각은 없는 거야? 아무래도 헬퍼를 잃었던 충격은 시간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울 테니까……. 여전히 후유증에 시달린다고 들었는데.”
엘리야는 ‘헬퍼’라는 단어가 나오자 비비안으로부터 시선을 피했다. 비비안은 엘리야와 눈을 맞추려 노력하며 말했다.
“위에서도 엘리야 네가 새로운 헬퍼를 만나는 게 좋겠다고……”
그 말을 들은 엘리야는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비비안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뺐다. 엘리야가 단호하게 말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비비안님. 앞으로 제 인생에 헬퍼는 없을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조금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겨우 헬퍼 없이 살게 되었는데…….”
숙소를 떠나는 비비안을 키리안이 현관까지 나와 배웅해주었다. 비비안은 문 앞에 선 키리안에게 말했다.
“키리안, 충고해줄 게 있는데.”
“네.”
비비안은 자신 앞에 서있는 키리안을 응시했다. 키리안은 겨울 하늘을 연상시키는 청회색 빛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은색과 하늘빛이 오묘하게 섞인 그의 신비로운 눈은 누구든지 홀리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비안이 말했다.
“그동안 천사와 악마가 유구하게 싸워왔지. 그런데 둘이 합숙하라고 명령이 나올 정도로 요즘엔 천사 악마 간 파트너쉽을 회사가 엄청 신경 쓰는 거 알지? 그런데 내가 걱정되는 건……”
비비안은 약간 뜸을 들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키리안에게 말했다.
“이번 파트너는 너에게 쉽게 마음을 열지 않을 거야. 그게 너한테 불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걱정돼.”
거기까지 들은 키리안은 왠지 자존심이 상했다. 그가 엘리야와 파트너가 되자마자 모든 주변의 천사들이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었다. 키리안은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파트너쉽이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저희는 공적인 관계잖아요? 저는 상대가 선만 잘 지켜준다면 상관없습니다.”
“으음…… 물론 그렇겠지, 키리안. 그런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거냐면 ”
비비안은 진심으로 키리안이 걱정된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몇 천 년 동안 악마 진영 쪽에서 엘리야는 실적 1위를 거의 놓쳐본 적이 없어. 악마 실적이 뛰어나면 파트너인 천사 실적은 그만큼 깎인다는 거 알지? 지금은 물론 키리안 네가 천사 내에서 엘리트지만, 엘리야랑 파트너가 되면 네 실적이 떨어지기 쉬워.”
‘실적이 떨어진다고? 내가?’
비비안의 말을 듣고 키리안은 당혹스러워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비비안은 키리안의 잘생긴 얼굴이 어두워지는 걸 지켜보다가 나긋하게 말했다.
“나는 그래서 네가 실적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일단 엘리야와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정말, 제 파트너가 한 번도 1위를 놓친 적이 없는 겁니까?”
“음…… 물론 그건, 아니긴 한데.”
대답하는 비비안이 눈을 굴리며 키리안의 시선을 피했다. 키리안은 비비안이 뭔가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비비안이 횡설수설하며 말을 이었다.
“엘리야가 1위를 놓친 적이 몇 번 있긴 했는데 그건 정말 과거의 지난 일이야! 아무튼, 잘 해봐!”
*
사람들은 흔히 죽고 나면 영혼들이 가는 ‘사후세계’가 존재할 거라고 믿는다. 사람들이 믿는 사후세계는 실제로는 회사의 형태로 굴러가고 있다. 신이 보스로 있는 이 회사의 이름은 ‘파라데이소스’(paradeisw)로 ‘낙원’을 의미했다. 지상과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파라데이소스는 신이 인간 세상을 주무르는데 필요한 모든 절차가 이루어졌다.
회사 이름이 말이 낙원이지, 천사와 악마 사원들에겐 결국 회사가 지옥일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 사원들이 막중한 부담을 느끼게 하는 회사의 방침 하나가 있었다. 천사와 악마의 실적들을 마치 실시간 확인해야 하는 주식처럼 전광판에 전시해놓는다는 것이었다.
건물 일 층에 들어서면 바로 진입하는 홀에다 말이다.
키리안은 일주일 만에 자신의 실적이 곤두박질 된 걸 보고 그 자리에서 꼼짝을 못 했다. 그날 홀에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키리안을 보며 모든 천사와 악마들은 그가 곧 파트너를 바꿔 달라고 요청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
‘엘리야 선배와 파트너가 된 지 일주일 만에 실적이 이렇게까지 떨어지다니……. 이 정도로 낮은 실적은 처음이야.’
그날 퇴근한 키리안은 심란한 마음으로 숙소에 들어갔다. 현관에 들어서자 키리안은 거실 소파에 앉아있던 엘리야와 마주쳤다. 키리안을 본 엘리야는 바로 거실 소파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일주일간 함께 지내면서 키리안은 숙소 안에서 엘리야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엘리야는 키리안이 퇴근하고 돌아오면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거의 나오질 않았다. 출근도 키리안보다 늘 먼저 해서 키리안이 눈을 뜨면 숙소 안에 없는 일도 많았다. 키리안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엘리야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러자 키리안의 머릿속에서 전에 비비안이 해줬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래서 네가 실적을 유지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일단 엘리야와 잘 지내려고 노력하는 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
“엘리야 선배!”
거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키리안의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엘리야는 방에 들어가려다 말고 뒤를 돌아 키리안을 바라봤다. 키리안은 얼굴을 약간 붉힌 채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의 깊은 호수 같은 청회색 눈동자가 엘리야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녁 혹시 안 드셨으면…… 같이 먹지 않을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