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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쟤는 왜 저렇게 변했대?’
급하게 업무가 끝난 듯 산더미 같은 서류를 들고나오는 시종들 사이로 얼핏 보이는 사람이 아벨이라는 것을 눈치채자마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한테 꽃을 선물해주며 얼굴을 붉히고 헤실헤실 웃는 등 예전의 귀엽고 깜찍한 모습들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고, 허점이 없는 사람처럼 날카로운 모습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피곤했는지 눈 밑에 그림자가 살짝 드리운 것을 보니 걱정은 배로 불어났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앨버트가 열린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아벨은 그를 살짝 흘겨보고는 다시 서류를 작성하였다.
“그래, 공작. 무슨 일인가?”
이런 일이 자주 있었다는 듯 앨버트는 자연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께서 이루신 그 일에 대해 제 여식과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잠시 시간을 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지금이라면 괜찮겠지. 들어오라.”
앨버트가 내게 슬쩍 눈짓하자 허리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아, 그래.”
점잖게 말하는 그의 말투에는 약간의 당황이 섞여 있었다.
도대체 왜? 어디서 당황한 거지? 내 인사가 잘못됐나? 내가 어디서 실수라도 했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공작, 할 말이 뭐라고?”
아벨의 입에서 다른 말이 나온 후에야 내가 잘못한 게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안심했다.
“폐하, 약속하신 대로 저희 딸을 황후로 맞아주십시오.”
하지만, 앨버트의 말에 그 안심은 순식간에 당황으로 바뀌었다.
뭐요? 약속? 그것도 황후로? 앨버트 이 사람, 썩었네, 썩었어!
내가 속으로 앨버트를 욕하는 사이, 아벨은 앨버트의 말에 이상하다는 듯이 눈썹을 들썩였다.
“벌써 때가 되었나?”
“조금 이른 감이 있습니다만,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군.”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신하들에게 휘둘리는 왕이라니. 에휴, 얘도 참 불쌍하다.
왜인지 그가 대놓고 싫다는 표정이나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 같아서 눈치를 스윽 살폈다.
예상과는 다르게 그는 질겁하거나 싫어한다는 표정을 짓지 않고,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왜지?’
약속 하나 때문에 억지로 결혼을 한다는 게 뭐가 좋다는 거지? 나 같으면 싫다고 질색하면서 어떻게든 결혼을 안 하려고 애를 쓸 텐데?
마치 그를 싫어하는 사람처럼 생각한 것이 이상해 고개를 내저었다.
아냐, 그와 사랑하기로 약속했잖아. 약속 때문인 게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이건 오히려 기회가 아닐까?
나는 사르르 웃으며 아벨과 서서히 눈을 맞추었다.
아벨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놀란 기색을 띠며 움찔거렸다.
“리즈······.”
그가 뭐라 중얼거렸지만, 내 귀에는 닿지 않았다.
내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살짝 당황하며 입을 열었다.
“공작, 약속했던 대로 공녀를 황후로 삼겠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는 앨버트를 살짝 째려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공작이 내게 약속한 조건은 기억하나?”
“예. 절대 외척이라고 해서 권력을 휘두르지 않거니와 제 여식이 거부하면 약속을 이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앨버트가 말한 그 조건이 의외라고 생각하며 작게 콧소리를 냈다.
그냥 이미 약속된 거라며 강제적으로 다 이행하거나 억지로 하라고 명령할 줄 알았는데, 은근 나를 배려해줬네?
아벨은 초조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프란시스 공녀, 공녀는 이 약속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어떠냐고? 당연히 너무 좋지! 내가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어!
나는 당장이라도 그와 결혼한다는 사실에 소리치고 싶은 것을 참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이 약속은 지킬게. 반드시 평범하지 않더라도, 남들처럼 서로 사랑하자.
약속을 꼭 지키자고 다짐하는 사이, 그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 때문에 조금 놀라 움찔하긴 했지만, 황제가 갑자기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것에 대한 긴장감과 당황으로 어느 정도 무마할 수 있었다.
“공녀, 결혼식은 미리 과인이 다 준비해두겠네. 조금 이르지만, 일주일 후에 하는 건 괜찮겠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날을 고대하겠습니다.”
내 말에 아벨은 방긋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의 귀여운 웃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슴 한구석이 살짝 욱신거렸다.
그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는 빨리 일주일이 지나 결혼식 날이 오길 바랐다.
***
일주일. 마냥 길 것만 같았던 그 시간은 세세하게 결혼식을 준비하고 귀족들에 대한 정보들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지나갔다.
‘이젠 아벨과 매일 붙어있을 수 있어!’
아벨과의 생활을 상상하며 헤벌쭉 웃는 사이, 사라는 어느새 내 머리를 다 빗고는 내 머리에 황관을 씌워주었다.
“자, 다 되었어요! 이제 예식장으로 가셔서 기다리시기만 하면 되세요!”
“수고했어.”
예식장으로 걸어가면서도 몇 번을 생각해봐도 이 결혼식은 정말 이상했다.
내가 입은 벨 라인 웨딩드레스, 부케에 있는 파란색 수국, 왕관에 박힌 사파이어까지 전부 내 취향에 맞춰져 있었다.
‘아벨은 분명 내가 다른 사람인 줄 알 텐데······? 어떻게 전부 내 취향에 맞춰진 거지?’
조금만 더 생각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때문에 곧바로 예식장 앞으로 가야 했기 때문에 더 생각하지 않았다.
예식장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아벨을 보자마자 싱긋 웃으며 말을 꺼냈다.
“폐하, 오래 기다리셨나요?”
“아니, 그대를 기다리는 시간은 즐거웠네.”
“읏······!”
그는 얼굴이 살짝 붉어진 나를 귀엽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슬슬 대신관이 부를 때가 된 것 같지?”
“그러게요.”
내 대답이 끝나자마자 기가 막힌 타이밍에 대신관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랑, 신부 입장!”
대신관은 그의 튀어나온 배와 갓 쪄낸 찐빵처럼 빵빵한 볼 속에 따로 성량이라도 담아놨는지 예식장 밖에서도 그 소리가 울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귀에서 피가 나는 것 같은 경험을 하며 예식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는 자신의 앞에 나란히 선 나와 아벨을 힐끗힐끗 쳐다보더니 두어 번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프리메르 제국의 황제, 아벨 살바토르 프리메르는 엘리자벳 세이 프란시스와의 결혼을 받아들입니까?”
“네.”
“프란시스 공작 영애, 엘리자벳 세이 프란시스는 아벨 살바토르 프리메르와의 결혼을 받아들입니까?”
“네.”
그는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들썩였다.
“이로서 이 혼인은 원만하게 이루어졌음을 여러분 앞에 엄숙하게 선언합니다.”
대신관이 축복으로 인해 하늘에서 금빛 가루가 쏟아져 내린 것을 마지막으로 결혼식의 기본적인 절차는 끝이 났다.
하지만, 나는 아벨과 함께 마차를 타고 행진을 해야 했고, 오늘 저녁과 내일 있을 피로연에도 참석해야 했다.
‘웃는 건 또 연기한다고 생각하면 돼. 그리고, 아벨이 있잖아. 난 그거면 돼.’
황후가 되고난 후, 날마다 웃으면서 생활해야 할 것을 생각하자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졌지만, 아벨과 같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 괜찮았다.
행진을 하면서 계속 웃으면 분명 광대가 저려올 것이 분명했기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마차에 타자, 그걸 또 언제 들었는지 아벨이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황후, 어디가 안 좋은가?”
“아, 아닙니다. 살짝 어지러워서요.”
그는 내가 안 좋다고 하면 당장이라도 황궁의를 불러올 것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의 모습과 과거의 모습이 겹쳐져서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지만, 이것도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질 것이다.
“진짜 괜찮은 게 맞소?”
“네,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에요. 이제 괜찮아요.”
나는 과거에 그랬듯이 웃는 얼굴이라는 가면을 쓰고 손을 흔들었다.
한 시간가량을 그렇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자니, 광대와 손이 저려왔다.
다행히도 너무 저려 아파지기 전에 행진은 끝이 났지만, 피로연은 이제 막 시작이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자 나와 비슷한 푸른색 옷으로 갈아입은 아벨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 준비는 다 되었소?”
“네, 폐하.”
다정한 연인처럼 그와 손을 잡고 연회장으로 내려가자,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도 모두 입을 다물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회장 중앙으로 안내하더니 허리를 살짝 숙이고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 곡 추겠나?”
“네, 영광이죠.”
그와 이렇게 제대로 춤을 춰 본 적이 얼마 만일까?
아마 아버지의 탄신 연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아벨과 다정한 연인인 척 피로연에서 당당하게 춤을 췄던 때를 떠올렸다.
-리, 리즈. 제가 실수할 수도 있는데······괜찮나요?
-괜찮아. 내가 이끄는 대로만 따라와. 조금 여유가 생긴다 싶으면, 그때 네가 나를 이끌어.
-네, 당신이 이끄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때도 지금과 같이 푸른색 드레스를 입고, 한껏 아름답게 꾸민 채로 그와 함께 춤을 췄었다.
그는 처음에는 조금 버벅거리는 듯 했으나, 금세 적응한 듯 자신이 먼저 리드하는 여유까지 갖추었다.
추억에 잠겨 있기 때문인지 자꾸만 지금 나와 춤을 추고 있는 아벨과 그때의 아벨이 겹쳐 보였다.
'그때도 그렇고, 가끔 실수하는 것도 귀여웠지.'
처음에만 조금 실수하고, 적응하고 난 후에는 여유롭게 리드해주는 것도 멋있었고······그냥 다 좋았다.
그와의 애틋한 추억을 한참을 빠져 있을 때, 그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나?”
“폐하의 생각이요?”
내 대답에 그는 부끄러운 듯이 귀가 붉게 달아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귀여운 반응에 빙긋 웃는 사이, 그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저······황후. 애칭으로 불러도 되겠소?”
“네, 당연하죠.”
나는 사르르 미소 지으며 여유롭게 몸을 빙그르르 돌렸다.
“리즈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그러지.”
아벨은 부드럽게 한 바퀴 몸을 돌리 내 손을 잡고는 나를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럼, 저도 애칭으로 불러도 될까요?”
“당연하지. 아벨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군.”
“네, 아벨.”
그와의 춤이 끝난 뒤로도 별로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고 모든 것이 순탄하게 넘어갔다.
귀부인들이나 영애들을 상대하는 것은 전에도 많이 해봤던 것이라 생각보다 쉬웠다.
그저 얘기를 나누고, 웃어 주고, 이따금씩 아벨의 얘기가 나올 때마다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신혼인 티를 내면 되었다.
그들과의 영양가 없고 진부한 대화가 끝나자, 남은 건 피곤함의 끝을 달리는 밤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