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야?”
이젠 하정향도 더는 참을 수 없어 대놓고 짜증을 부렸다. 이이상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이는 분명 그 작자가 골탕을 먹이려 의도적으로 이러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묘하게 뒤통수가 근질거려 돌아보니 소이령이 양 볼과 미간에 힘을 준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황급히 아무 일이 아니란 듯 하정향은 딴청을 부렸지만, 도무지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끝내 추궁하는 한 마디가 더 따라붙었다.
“유모. 이제 털어나 봐요. 이 모든 게 우연 아니죠?”
“네? 대체 뭐가...”
“벌써 다섯 번째에요. 우리가 가는 곳마다 목이 터져라 우는 사람들이 있는 게 말이에요. 게다가 이 모든 소란을 벌인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잖아요.”
그래서 이 무렵 냉일비는 따로 명이 없었음에도 같은 일이 다섯 번이나 반복되다보니 알아서 마적들을 땅에서 꺼내주고 있는 중이었다.
“그야 구해준 마적들이 한결같이 황소를 탄 털북숭이 괴인에게 당했다하니 당연히 그가 이 모든 일의...”
“나 모르는 사이 무슨 일 있었죠?”
소이령이 더는 시치미 떼지 못하게 아예 말을 끊고 나왔다.
“어, 없어요.”
“유모!”
오리발도 더는 소용없었다. 하정향은 이대로 계속 발뺌했다간 소이령이 어떻게 나올지 눈에 선해 결국 백기를 들었다. 소이령은 몇날 며칠 말은커녕 제대로 토라지면 밥도 잘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어쩌다 그런 무뢰한과 엮여서...’
덥석덥석 사내에게 손을 주는 여인 취급을 당하지 않나, 또, 으슥한 골목길로 사내를 끌고 가 뭔가 특별한(?) 걸 원하는 여인 취급을 당하지 않나.
하지만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그녀에게 있어 딸이며 동생과도 같은 소이령의 괜한 의심을 사게 되었단 점이다.
‘내 앞으로 두 번 다시 목화밭에 발을 들이면 하(河)씨가 아니라 하(蝦)씨다!’
죄 없는 두꺼비까지 들먹인 맹세 아닌 맹세를 끝으로 하정향은 소이령이 그토록 원하는 진실을 들려주었다.
“아가씨. 사실 주천에서 그를 만났어요.”
“정말이요? 그런데 왜 저는 몰랐죠?”
“그야 알 수가 없죠. 당시 아가씨는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었으니.”
“아... 그때군요.”
당시의 일은 스스로 생각해도 부끄러운지 소이령이 살짝 볼을 붉혔다.
그 덕에 하정향은 좀 더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었다.
“아! 그보다 아가씨 기억해요? 술이 깨신 아가씨께 물을 드리던 제가 성급히 나간 일 말이에요.”
“기억해요. 당시 유모의 태도가 어딘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를 만나러 간 거였군요.”
“맞아요. 당시 찾아왔던 자가 바로 그자였거든요. 아니, 사실 주루에서 재회했을 때 먼저 그와 이야기하기로 약조를 했어요. 그렇다고 그처럼 불쑥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그래서 그와 대화를 하게 되었죠. 전과 달리 말끔히 목욕을 하고 나타나 더는 코를 썩게 하는 냄새가 나지 않았거든요. 호호.”
다시 생각해보니 제멋대로인 그 작자가 냄새난단 말에 말끔히 씻고 왔다는 것이 웃긴 일이긴 했다.
“그래서요?”
“그래서긴 뭘 그래서예요. 일단 따졌죠.”
“따져요?”
“그렇잖아요. 가뜩이나 목화밭에서의 일로 좋은 감정도 없는데. 더는 볼 거라 생각지도 않은 자를 만나니 의심부터 들더군요. 혹시라도 아가씨께 무슨 좋지 못한 마음을 품은 것은 아닌가하는 그런 의심 말이에요.”
“유모. 그건 아무래도 유모가 실수한 것 같아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와 하정향은 살짝 서운한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이유에서죠?”
“일단 가장 단순한 이유를 들어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에요. 당시 유모와 저를 포함해 냉 아저씨까지, 어느 누구도 그를 당해내지 못했어요. 그런 그가 정말로 흉심을 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 모두가 덤빈다 해도 과연 당해낼 수 있을까요?”
‘그러고 보면...’
워낙 창졸지간에 벌어진 일이라 잊고 있었지만, 당시 자신과 소이령을 어린 아이 다루듯 했던 것도 그렇고, 그런 그녀들을 구하려 나선 냉일비까지 침묵시켜버린 그의 능력은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는 그가 허공에서 미처 자세를 잡지 못하고 떨어지던 저를 받아줬을 때 알게 되었어요. 제멋대로 우리를 희롱하던 그가 그때는 외려 얌전히 저를 내려주더군요. 어찌 보면 그때가 그의 입장에서 더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음에도 말이죠.”
“아, 아가씨.”
하정향으로선 마지막 말은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야기하다 깨닫게 된 것인데.”
“또 있어요?”
“솔직히 이건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 다만... 만일 앞선 자가 그가 아니라 우리였다면 어땠을까요? 지금 우리 손에 구해지는 마적들을 지금처럼 불쌍히 여길 수 있었을까요?”
“!”
하정향은 한순간 망치에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말마따나 만일 앞장 선 이가 그 작자가 아닌 자신들이었다면 지금의 마적들은 고스란히 자기들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사과해야겠어요.”
“네?”
“굳이 그가 먼저 나서 지적하지 않아도, 이번에도 엄연히 우리의 잘못이 커요.”
“하지만 아가씨. 모든 건 다 추측이고 우연...”
우연이란 말을 내뱉으려니 하정향은 갑자기 당시 백무룡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사건건 왜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오. 그러니 피차 더는 피곤하게 우연을 필연으로 만들지 맙시다.”
‘그렇구나. 어쩌면 그 작자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 쪽이 우연을 필연으로 만드는지도...’
이런 생각이 들자 하정향은 왠지 가망이 없다 여긴 희망이란 씨앗에 싹이 솟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가씨.”
“네?”
“우리 꼭 그를 다시 만나요. 아무래도 제가 생각을 잘못해도 한참 잘못한 거 같아요. 이번 일 진심으로 정중히 사과해야겠어요.”
“호호. 유모. 혹시...?”
“네? 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아가씨. 제 나이가 얼마인데. 그리고 다시 만났을 때 느낀 제 감으로는 그자 결코 서른 중반을 넘기지 않았어요.”
“설마요. 제가 보기엔 적게 잡아도 마흔 중반은 되어 보이던데.”
“호호. 하고 있는 꼬락서니가 그래서 그렇지. 그 점은 이 유모를 믿어도 좋아요. 괜히 아가씨보다 십 수 년을 더 산 게 아니에요.”
소이령과 오십보백보의 헛다리짚기를 끝마친 하정향은 이후 한 가지를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백마 탄 왕자라면 더할 나위 없었겠지만, 황소 탄 야인이면 또 어떠랴. 그를 우리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최소 아가씨께서 사랑하는 남자 정도는 스스로 택할 권리를 얻게 될 것이다.’
그러려면 반드시 백무룡의 능력이 이 모든 걸 이루게 해줄 정도로 뛰어나야 했지만...
그건 시간을 두고 찬찬히 관찰하면 되었다. 후회는 그 모든 걸 확인한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말이다.
***
감숙은 돈황 남쪽의 명사산(鳴沙山)처럼 모래와 돌이 퇴적되어 형성된 산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이러한 산들은 때론 구릉으로, 또 때론 협곡으로 나타나 마적 떼처럼 여행객들의 발길을 붙잡기도 했다.
음머.
황우도 그런 듯 마치 토성처럼 쌓여진 협곡을 대하자 잠시 걸음을 멈췄다.
“나도 안다. 그러니 멈추지 말고 가.”
음머어.
백무룡이 재촉하듯 다리를 올려놓은 뿔을 흔들자 황우가 다시 걸음을 떼었다.
그런데 뭔가를 경계하듯 걸음을 멈췄던 황우가 협곡을 다 빠져나가기까지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멈춰.”
그러자 백무룡이 먼저 황우를 멈춰 세웠다.
‘이것들 보게. 평범한 마적은 아니란 건가?’
이제까지의 마적들은 죄다 앞뒤 안 가리고 덤비는 놈들이었다. 그런데 이번 놈들은 마치 따로 노리는 사냥감이 있는 듯 가장 노리기 좋은 협곡을 빠져나가기까지 꼼짝도 않고 있었다.
‘혹 모르니... 약을 한 번 올려볼까?’
이후 백무룡은 오른 쪽 발을 당겨 황우를 빙글 돌려세웠다.
“가자.”
음머.
황우가 다시금 협곡을 통과하기 시작했고, 그것이 끝나면 또 다시 머리를 돌려 반대로 통과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이쯤 되면 소나 그 소를 탄 인간이나, 지켜보는 자가 있다면 한결같이 다들 이렇게 말할 것이다.
***
“저런 미친놈들. 똥 마려? 아님 오줌 마려? 대체 왜 아까부터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왔다 갔다 하는 거야? 너!”
결국 참다못해 협곡 위에서 지켜보던 자가 근처의 수하 하나를 불러들였다.
“예.”
“치워. 당주님께서 아시기 전에 당장 저 두 잡종들을 치워버려!”
“예. 향주님.”
명을 받은 수하 하나가 협곡을 내려가 그 순간에도 멈추지 않고 협곡을 왕복하는 소를 멈춰 세우려 했다.
하지만...
음머어어어!
퍽.
“으악!”
오히려 발광하는 소에 받쳐 아니, 그것도 모자라 소에게 물린 채 질질 협곡 밖으로 끌려가 버려졌다.
더 기가 막힌 건 소는 그 후에도 떠나지 않고 계속 협곡을 왕복할 뿐이었다.
이젠 직접 도는 자보다 지켜보는 자가 더 돌아버렸다.
***
“아흑. 아아...”
“헉. 헉.”
여인의 달뜬 신음성과 사내의 거친 숨소리가 한낮의 태양을 무색하게 만들던 그때.
느닷없이 들이닥친 불청객이 이 모든 것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주님!”
“꺄아악!”
누군가를 찾는 다급한 음성이 한순간에 여인의 달뜬 신음성을 비명으로 바꾸어버렸다.
한창 막바지로 치달렸던 누군가로선 그야말로 방해한 자의 혀를 뽑고, 사지를 잘라도 모자랄 판국.
다행히 불청객은 한 마디를 더 보태 이렇게 될 운명에서 스스로를 구해냈다.
“저, 전멸입니다.”
“뭐? 전멸?”
뜬금없어도 너무 뜬금없어 누광기(樓獷崎)는 대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전멸이란 두 자가 나오나 그걸 먼저 생각해야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수하들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사로잡으란 명을 전멸로 바꿀 순 없었다.
유일한 가능성은...
“혹 연놈들이 손쓸 새도 없이 자살이라도 했느냐?”
“아,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허면 대체 어떻게 해야 사로잡으란 명에 전멸이 튀어 나와!”
“반대입니다.”
“반대?”
“예. 불행히도 전멸당한 쪽은 사로잡으려는 쪽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가... 헙!”
하지만 수하는 채 말을 다 뱉지 못하고 그 입이 누광기의 손에 붙들렸다.
“뭐라? 우리 쪽이 전멸? 겁도 없이 이 몸께서 일 치르는 중에 뛰어들더니. 네 놈이 진정 돌았구나. 고작 연놈들 셋을 잡는 일에 어떻게 해야 우리 쪽이 전멸을 당해?”
“웁. 우웁.”
“말 못하겠지? 네놈이 생각해도 미친 소리라. 그렇지, 어!”
우둑.
누광기는 더는 참을 수 없어 그대로 수하의 얼굴 반을 으스러트려버렸다.
“꺄아악!”
그 광경에 찍 소리는커녕 숨도 제대로 못 쉬던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너도 닥쳐!”
퍽!
한번 치솟기 시작한 살의가 이전까지 몸을 섞던 여인의 정수리마저 부셔버렸다.
그 결과 가뜩이나 방사(房事)의 흔적으로 엉망이던 천막 안이 땀 냄새와 혈향에 젖어 한 순간도 못 있을 곳으로 변했다.
펄럭!
그 때문인지 누광기가 더는 있기 싫다는 듯 천막을 빠져나왔다. 대충 하의만 걸치고 나온지라 땀과 피에 젖은 상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로인해 더더욱 인간이라기보다는 상체를 덮은 누런 털들로, 호랑이도 산 채로 찢어 죽인다는 남만의 흉폭한 맹수 황모대원(黃毛大猿)이 연상되었다.
“냉일비. 강서에서 검으로 다섯 손가락에 든다하더니, 감히 이 몸이 하는 일에 반항을 해? 그래 죽여주마. 아니! 부디 죽여 달라 빌게 해주마!”
으르렁거림을 끝낸 누광기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덩치에 비해선 꽤나 가볍고 빠른 신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