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남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에
입을 틀어막아 버렸다.
터져 나온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었다.
손녀가 단명할 팔자라는 말에
노인은 귀남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 이노옴!!! 니 놈이 뭘 안다고!!
단명할 팔자? 내 손녀가 단명할 팔자라니
그게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냐 이놈아! "
" 아 아니 영감님. 고정하세요.
말이 잘못 나왔어요. 잘못 나왔다고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해요.
근데 이거 놓고 말씀하세요. "
노발대발하는 와중에도
여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이 앉아 있었다.
그게 더 무서웠고 귀남을 주눅 들게 했다.
" 그만하시죠. 이게 제가 오늘 점사를 볼
기분이 아닙니다.
자. 이 돈 돌려 드릴 테니 돌아가시죠."
" 계속하세요."
" 네?"
"계속하시라고요."
" 들을 것도 없다. 가자!
이런 엉터리 같은 놈을 봤나!
죽어라. 이놈!!!"
다시 멱살을 잡고 흔드는 통에 옷이 다 뜯어졌다.
" 아 좀 진정하세요. 영감님!!!"
겨우 노인을 떼어냈다.
귀남은 느낄 수 있었다.
들어 온 존재가 여전히 나가지 않고 있음을 말이다.
" 힘이 장사시네. 왜 이러세요. 진짜.
규칙 1번 반말하지 마시라니까요.
그래요. 골탕 좀 먹여 보려고 했습니다.
됐어요? 당신네처럼 교양머리 없고
안하무인에 돈 자랑만 실컷 하는데
그 자손들이 잘살 것 같아요?
단명할 팔자를 제가 뭐 장수할 팔자라고
할 순 없잖아요!!!"
" 그래도 이놈이!!"
"아버지!!!"
갑자기 여자가 소리를 질렀다.
" 나가세요. 얘기 좀 하게."
" 무슨 얘길 하려고 그러냐?
저놈 순 날강도 같은 놈이다.
골탕 먹이려고 했다고 하지 않느냐!"
" 나가세요!!!!"
노인은 딸의 눈치를 보더니 나갔다.
귀남은 진정하고 다시 앉았다.
" 계속하세요."
" 아니 뭘 계속 하냐고요."
" 손녀가 단명할 팔자라니.
이 사주가 제 딸이라는 걸 어떻게 아셨나요?"
" 네? 그건 사모님이 말씀해 주셨잖아요."
" 아뇨. 난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대체 어떻게 안 거예요?"
" 아니에요. 이거 사주 주시면서 저한테…….
말씀을…… 안 해 주신 것……같기도 하고……
한껏…… 같기도 하고…….
아 맞다! 사진 보여 주셨잖아요!
딱 보니까 사모님이랑 판박이라서
알겠던데요?"
"제가 낳은 딸이 아닌데요."
" 아…… 그게……
솔직해야 한다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계속 저 떠보시면 못 봐 드립니다.
돈 드릴 테니 돌아가세요."
" 도와주세요.
어떻게 해야 할지."
귀남도 난감했다.
그냥 툭 튀어나온 말인데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 다시 한 번만 봐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서 집중 해보기로 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최대한 이 사람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문제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리고 다시 사주와 사진을 보았다.
" 집중해 보자……
하나님. 부처님. 조상님.
도와주세요.
다시 한 번 알려 주세요……."
한참을 책상머리에서 사주와 사진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몸이 심하게 떨려 왔다.
그리고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속 아이의 어두운 과거들이 떠올랐다.
" 이 아이는 단명할 팔자입니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것도
사모님이 어떻게든 살려 보겠다고
붙잡고 있어서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겁니다."
" 어떻게 해야 할까요?"
" 버리세요."
" 네? 무슨 말씀이신지……."
" 주워 왔으니 버리란 말씀입니다."
귀남은 자신이 말하고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자식을 버리라니.
" 사모님 팔자엔 자식이 없습니다.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겁니까?
이미 두 번씩이나 자식을 뱃속에서 죽이고도
자식을 원하다니……."
여자는 놀라 자빠졌다.
" 아니 그걸 어떻게……."
" 20대대 몸을 함부로 쓰셨네요. 맞죠?"
" 아 그게… 사실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세상 빛도 못 보게 하고
죽였으면 이렇게 사는 것도 감지덕지해야지.
팔자에도 없는 자식 길에서 주웠다고
데려다 키우면 부모가 됩니까?"
여자는 울기 시작했다.
" 그땐 정말 어쩔 수 없었어요.
원하지 않는 임신이었다고요."
" 6개월이었어!!!
살인이야 살인!!!!
뉘 앞이라고 변명을 해!!!!"
귀남은 이미 눈이 풀려 있었다.
독기가 바짝 오른 독사의 눈깔을 하고 있었다.
" 맞아요. 두 생명을 지웠어요.
하지만 이 아이는 절대로 지워 버릴 수 없어요.
제 아이예요. 제가 지금까지 키웠단 말이에요."
" 사실 버리든 버리지 않던 이 아이는 죽습니다.
사모님 옆에 있으면 죽어요.
알아요. 사모님 애쓰신 거.
이 아이와 인연은 여기 까집니다."
귀남은 다시 화를 억누르고 달랬다.
"어떻게 자식을 버려요. 20년 동안 키웠는데."
" 남의 집 귀한 자식을 왜 훔쳤어!!!!"
"……."
여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귀남을 쳐다봤다.
" 훔친 게 아니에요. 그 여자는 죽어 가고 있었다고요."
" 당신 의사잖아! 그 여자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잖아!!!!"
여자는 넋이 나갔다.
" 제자리에 갖다 놓으세요. 그 아이를 위해서."
" 그 아이의 부모는 이미 죽었어요."
" 그러니까요.
그 부모들 옆에 두세요. 제자리에.
없어요. 살릴 방법이"
귀남은 억누르려고 했지만 말이 계속 튀어나왔다.
" 말이 되냐? 말이 되냐고!"
노인은 다시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 대체 왜 죽는다는 거야!
부모 둘 다 의사에 건물에 땅에
돈이 썩어 죽을 때까지 있는데 대체 왜!!!"
" 영감님…….
그것들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
" 그럼 뭣이 문제냐?!"
" 정신적인 문제입니다.
지금 아이는 매우 고통스럽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울증이 무서운 거예요.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단단하지 못한 터에서
태어났습니다.
쥐들이 물어뜯고 벌레들이 들러붙어도 그걸 보면서도
제힘으로 뜯어내지 못했어요."
" 그걸 기억한단 말이에요?"
" 태어난 터가 이 아이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귀남은 말을 하면서도 고통스러웠다.
그 아이의 고통스러운 과거가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잘 돌봐야 주셨어요.
덕분에 운명을 거스르고 잘 살았습니다."
" 에라이 무당년의 새끼!
천벌 받을 거다. 이놈아!!"
" 믿을 수 없겠지만 그 아이의 무의식 속에
죽어 가는 엄마의 모습이 있을 겁니다.
살아 있는 동안 최대한 잘해 주세요."
" 부적이나 굿을 해서 살릴 순 없을까요?"
" 운명은 그딴 것으로 바꿀 수 없습니다.
차라리 지금은 치료를 받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의사시니 훨씬 더 잘 아실 거라 생각이 되네요."
" 알겠습니다."
" 그리고 세상 빛도 못 본 두 아이를 위해서
항상 기도하길 바랍니다. 왜냐하면 지켜보고 있거든요."
"저런 미친 새끼!! 입을 확 꿰매야 정신을 차리지!!!"
노인은 시원하게 욕을 하고 산에서 내려갔다.
욕을 들은 귀남은 오히려 속 시원했다.
죄책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게 설사 사실이라 해도
정말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속으로 삼켜야 했다.
설사 그 아이가 죽는다고 해도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 아니던가?
" 솔직하게 말씀드려 죄송합니다."
" 아닙니다. 잘 알겠습니다."
" 제 말이 틀리길 바랍니다.
그냥 흘려들으세요.
요즘 시스템이 잘 되어 있잖아요.
의사니까 더 잘 아실 테고
저희 같은 직장인들도 정신과
들락날락합니다.
요즘은 손가락질 받을 일도 아니고요.
꼭 치료 잘 받게 해서
건강하게 살았으면 좋겠네요."
정신이 돌아온 귀남은 미안했는지
그 여자를 위로했다.
" 그리고 이 돈은 드릴게요."
" 아닙니다. 받아두세요.
제 딸을 위해서 잘 빌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여자는 눈물을 닦으며 밖으로 나갔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비틀거리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 아씨 진짜 미치겠네!!!
야! 미친놈아!!!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그게 지금 할 소리냐!!!"
귀남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돈 자랑하고 어머니를 무시했던 사람들을
골탕 먹이려고 했던 일인데
또 이런 사단을 만들다니…….
귀남은 마루에서 한참을 멍하게 서 있었다.
손에는 삼백만 원이 덩그러니 있었다.
" 아니 왜 이러는 거지.
진짜 입을 꿰매야 정신을 차리겠냐?
아씨, 왜 하필 어머니도 없을 때
이런 일이 생겨서……."
귀남은 자신의 손으로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동일이었다.
" 여보세요."
" 집에 내려가니까 좋냐?"
" 하……오랜만에 오니까 진짜 좋긴 한데……."
" 무슨 일 있냐?"
" 나 또 사고 친 것 같다."
" 내려간 지 이틀 만에 사고를 쳤다고?"
" 하……나도 왜 이러는 모르겠다. "
"무슨 일인데?"
" 말하자면 길다.
방송국은 별일 없냐?"
" 무슨 일 있겠냐.
이제 며칠 있으면 대통령 선거일이니까
그거 방송 준비하느라 바쁘지."
" 그래. 별일 없어야 할 텐데."
" 너 안 올라와?"
" 선거 다 치르면 복귀하란다."
" 진짜? 땡잡았네."
" 그래. 푹 쉬다 올라가야지."
" 야 근데 진짜 신 후보가 당선되면 어떻게 해?"
" 여기도 뉴스 나온다. 인마.
다 보고 있어. 다행히 지금 지지율로는 어림없다.
다른 후보 사퇴해도 왜 지지율이 안 오를까?"
"그러게. 참 괜찮은 분인데 말이야."
" 야 중립을 유지해야지 특정 후보 지지하고 있냐.
방송국 PD란 놈이."
" 참나. 그렇게 잘 아는 놈이 생방송 중에
신 후자님이 대통령이 될 겁니다. 이러냐?
참 중립적인 놈일세."
"됐다. 왜 전화했냐! 놀리려고 전화했냐?"
" 아니, 우리 엄마 산소 가 봤냐고?
내가 가보라고 했잖아."
" 아 맞다. 내일 가본께.
근데 왜 어머니 산소 계속 가보라는 거야?"
" 아니. 그냥. 나도 잘 못 내려가니까."
"아니 뭐 산소가 떠내려갈 일도 없고.
너 뭐 잡히는 거 있어?"
" 아. 아냐……."
" 말해 봐. 우리 어머니한테 물어볼게."
" 사실은…… 꿈에 계속 어머니가 나와."
" 어머니가 너 보고 싶은가 보지."
" 뭐 가끔 꿈에 나오기는 하는데……."
" 왜? 모습이 좀 안 좋으셔?"
" 어……."
" 꿈에 어떻게 나오시는데?"
" 물에 빠진 사람처럼 잔뜩 젖어서……."
귀남은 동일의 말을 듣고 움직이지 못했다.
뭔가 불길한 일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