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남의 방
새벽 5시.
꿈속은 고통스러웠지만
몸과 마음이 매우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꿈속에서 그들이 나타난 것은 의문이었다.
분명 장 부장과 그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 뭘까?
분명 장 부장이 그들과 연결되어 있을 것 같아.
피를 더는 묻히게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장 부장 손에 이미 피를 묻혔다는 소린가?
장 부장이 혹시 그들을 죽인 아들들의 자손이란 말인가?"
귀남은 낮에 어머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 네 몸에 잡것들이 달려 있는지도 모르면서
누굴 심판 한단 말이냐?"
" 다른 사람들에 붙어 있는 잡귀들만 보느라
정작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들은 보지 못하는구나.
수신제가부터 하자. "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이리저리 풀었다.
온몸이 짓눌려 작은 가방 속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뻐근했다.
" 천장이 이렇게 낮았었나?"
어렸을 때 크고 높았던 모든 것들이 축소된 것 같았다.
귀남은 책상 위에 놓인 앨범을 꺼내
자신의 어린 시절 사진을 보았다.
" 참. 벌써 30년도 더 된 것 같네.
어떻게 웃는 사진이 한 장도 없냐.
그땐 뭐가 그리 힘들었기에…….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어릴 적 귀남은 자신을 가뒀었다.
그 누구도 어머니가 무당이라는 이유로
흉을 보거나 손가락질을 한 적이 없음에도
귀남은 무당인 어머니가 부끄러웠고
빨리 어른이 되어 도망치고 싶은 마음뿐이었었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문틈 사이로
장독대 앞에서 빌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몇 십 년 동안 빠짐없이 물을 뜨고 비셨다.
대체 무엇을 위해 비는 것인지.
그 대상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귀남은 이제 부쩍 늙은 어머니가 가여웠다.
문소리를 들었는지
어머니가 돌아보셨다.
" 푹 자지 않고?"
" 잘 잤어요."
' 어디 불편한 건 없었고?"
" 네."
" 그래 씻어라.
오늘 특별한 손님이 오실 거야."
" 특별한 손님이요?"
" 그래. "
귀남은 씻고 가볍게 밥을 먹었다.
소시지와 장조림. 그리고 계란후라이.
어릴 적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절대로 밥을 먹지 않았었다.
아침 밥상에 그 반찬들이 그대로 올라왔을 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어머니의 밥상은 참 신비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
그 소소한 반찬들이 몸속을 채우는 순간
그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는 힘이 생긴다.
20년간 아침밥을 먹지 않았던 귀남은
오랜만에 주체할 수 없는 힘을 내는
마법의 약을 먹은 것 같았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몸과 얼굴을 정돈하고
절을 올리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 제가 도와 드릴 건 없어요?"
" 아니다. 그냥 넌 쉬어."
' 알겠어요."
" 그리고 특별한 손님이 널 만나러 오면
널 데리고 갈 것이다.
그분을 따라가면 된다."
" 그분을 따라가라고요?"
" 그래."
" 그분이 누구신데요?"
" 보면 알 것이다."
어머니 일을 도와주는 몇몇 분들이 오셔서
귀남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그분들은 곁눈질을 할 뿐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마도 어머니의 당부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옹기종기 모여 대기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왠지 마음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다행이야. 외롭진 않으시겠다."
마루에 앉아서 태평하게 햇볕을 쬐고 있는데
멀리서 누군가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대번에 그 사람이 특별한 손님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스님!"
귀남은 허겁지겁 산비탈을 내려가 스님을 맞이했다.
산을 넘으면 해담사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는데
그곳에 계신 주지승이셨다. 귀남은 넙죽 절을 하였다.
" 그래 잘 지냈느냐?"
" 네. 스님.
하나도 안 늙으셨네요?
어머니가 오늘 특별한 손님이 오신다더니
스님이셨어요?"
" 안 늙긴.
눈 깜짝할 새 늙은 중이 되어 버렸지 뭐냐.
특별한 손님은 무슨.
이놈아, 자주 좀 들려.
어머니 외로우신데.
말벗도 해 드리고 해야지."
" 아니 이렇게 북적거리는데
외로울 시간이 있으시겠어요?"
" 저런 사람 백 명 천명이 너랑 비교 하겠느냐?"
" 이제 자주 들려야죠."
" 그래. 얼마나 어지러운 세상이냐."
"네?"
" 저기 저 줄지어 기다리는 사람들을 봐라.
남에게 미래를 구걸하니 말이다.
얼마나 두렵고 무서우면 저리하겠느냐?"
" 뭐 마음의 안정을 찾아가면 좋죠."
"녀석. 어릴 때는 죽어도 싫다고 하더니
그러니까 인간사 어찌 될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 그때처럼 오늘도 매 좀 맞을까요?"
" 아직도 기억하느냐?"
" 그럼요. "
" 얼마나 네 천방지축으로 날뛰었으면
도를 닦는 중이 매를 들었겠느냐?
그땐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해라."
" 아닙니다. 따끔하게 맞아서
지금 그나마 사람 구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귀남은 무당이었던 어머니를 피해
스님이 계시는 곳으로 자주 도망을 치곤했었다.
그곳에서 잠도 자고 밥도 먹었다.
천자문도 배우고 그림도 배웠었다.
스님은 그를 자식처럼 생각했다.
" 스님 오셨습니까?"
" 네. 귀남 어머니. 별일 없으시지요?"
" 네. 저는 스님 덕분에 잘 있습니다.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시지요?"
" 아닙니다. 오늘은 귀남이와 마시겠습니다."
" 네. 그러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옥은 나와서 스님을 맞이했다.
" 스님. 어디로 모실까요?"
" 차는 됐다. 걸어갈 것이다.
아직 걸어 다닐 순 있다."
스님과 귀남은 길을 걸었다.
주변은 한결같았다.
집만 조금씩 고쳤을 뿐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귀남은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고 화도 났다.
모든 것이 멈춰 버린 고향이 참 진절머리가 났다.
" 서울 생활은 어떠하냐?"
" 뭐 이제 20년 넘게 살다 보니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처음엔 신기하던 모든 것들이
눈에 익더니 자연스러워지고
어떨 땐 가소로워질 때도 있습니다."
" 가소롭다?"
" 아등바등 사는 제 모습을 볼 때면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가져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꼭 쥐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면 다 부질없는 것들인데
너무 쉽게 허물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것이
과연 옳은가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
귀남은 오랜만에 스님을 만나서
뭔가 건설적인 어른으로 자랐다는 것을
흉내 내고 싶었다.
" 어허. 그놈 참.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이곳이 변하지 않음을 한탄하고 있다니.
너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으냐?"
귀남은 속마음을 들켜 몹시 당황했다.
얼굴까지 빨개져 있었다.
" 아니 그걸 어떻게.
스님 앞에선 정말
생각도 아무렇게나 할 수 없군요."
" 올해 나이가 몇이더냐?"
" 마흔입니다."
"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된 나이가 되었는데도
여전히 흔들리고 있구나."
" 겸손하겠습니다."
"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곁에 두고 있느냐?"
귀남의 머릿속에는 단 한 명의 사람만 떠올랐다.
장 부장이었다.
" 그를 미워하느냐? 아니면 시기하는 것이냐?"
" 사실 마음에 걸리는 사람이 있긴 합니다."
" 그가 직접적으로 해를 끼친 적이 있더냐?"
" 아닙니다. 그저 그 사람을 가까이하면
토악질이 나오고 머리가 깨질 듯 아프고
사지가 찢기는 고통이 느껴집니다."
" 그렇다면 그자는 사람이 아닌 요괴의
모습을 하고 있겠구나?"
" 아닙니다. 평범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주변에 잡귀들이 많아서
요괴 같은 행동을 하는 것 같습니다."
" 잡귀들이라……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믿느냐?"
귀남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스님이 어떤 의도로 말씀을 하려고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 전 어쩌면 좋습니까?
그들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뭔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
" 그자는 지금 미쳐 있다."
" 미쳐 있다고요?"
" 자신이 하나의 신이라 생각을 하는 것이지."
"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 그자를 무너뜨릴 방법을 찾아야지."
" 네?"
" 더는 지체할 수 없다면 철저히 무너뜨리는 수밖에
그자 때문에 많은 사람이 잘못된 믿음으로
죽을 위험이 있단 말이다.
그자도 살리고 다른 사람도 살리려거든
서둘러야 할 것이다. "
" 죽을 위험이 있단 말씀이세요?"
" 그렇다. "
" 저는 평범하게 살고 싶습니다.
그저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관여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 그래. 잘 생각했구나.
눈감고 귀 닫고 그렇게 살려무나.
세상만사 참견 질하고 다니지 말고."
" 네. 스님.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 이리로 올라가면 된다. 거의 다 왔느니라."
10분 정도 산비탈을 올랐다.
아침 산비탈은 축축했고
콧구멍이 아릴 정도로 상쾌했다.
말 그대로 싱싱했다.
" 다 왔느니라."
그곳엔 누군가의 무덤이 모여 있었다.
" 여긴 누구의 무덤입니까? 엄청 많네요."
언뜻 봐도 20개의 가까운 무덤이었다.
스님은 산등선을 쭉 훑어보고 합장을 한 뒤
귀남에게 말했다.
" 이곳은 200년 동안 대대로
이어진 무당들이 모여 있는 무덤이다."
" 무당들이요?
무당들만 묻힌 무덤인가요?
희한하네요. 이런 곳이 있다니.
무당들이 이렇게 많아요?
게다가 한 곳에 다 묻혀 있다는 게
신기하네요. 처음 봅니다. 이런 곳은."
" 저 맨 아래쪽이 너희 어머니가 묻힐 곳이다."
" 제 어머니 묻힐 곳이라고요?"
" 그렇다."
" 와, 무슨 국립묘지 같네요.
무당들만 모아 놓은 곳도 있고.
저희 어머니를 모실 묘가 있단 소리는 못 들었는데.
뭔가 무당들의 협회에 가입해서 얻은 건가요?"
귀남은 신기한 것을 본 것처럼 떠들어댔다.
바로 그때 스님이 말했다.
" 이곳은 너의 조상들의 무덤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