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4일┃
짙은 먹구름이 낀 일요일 오후, 태양은 곧 5만의 관중이 들어찰 안필드(Anfield)가 품고 있었다. 사방을 둘러싼 좌석과 불사조를 그려 넣은 깃발, 하나둘 입장하는 사람들의 복장과 그들이 터트린 홍염(紅焰). 어느 것 하나 붉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잉글리쉬 프리미어리그(EPL) 26라운드를 앞두고, 홈팀인 리버풀과 원정팀인 토트넘 선수들은 미리 나와 몸을 풀었다. 경기장에 흐르는 음악은 제법 웅장했지만, 공을 차는 선수들의 표정엔 아직 장난기가 가득했다.
“Sion!” 멀리서 외치는 동료의 부름에 시온은 손을 들어 답했다. 그라운드 위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검은 머리는 멀끔히 빗겨져 있었다. 베이지색 재킷 안에 흰 후드를 껴입은 시온을 보고 같은 팀 동료들은 오늘 멋 좀 부리고 왔네, 하며 놀려댔다. 시온은 쓴 웃음을 지었다. 그는 오늘 유니폼을 입지 않는다.
지난 경기에서 당한 다리 부상으로 휴식을 부여 받았으나, 마음이 불편해 기어이 안필드를 찾았다. 현재 승점 57점으로 리그 3위를 기록 중인 토트넘에게 오늘 경기는 매우 중요했다. EPL 빅6 클럽 중 하나인 리버풀을 원정에서 잡는다면, 장차 우승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부상으로 결장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해 죽겠다. 자꾸 부상 당하던 순간이 떠올라 쓸데없는 가정만 늘어놓게 만든다. 미리 알았다면 피할 수 있었을 텐데, 따위의.
경미한 부상이니 괜찮다고 말했지만, 감독은 선수 관리 차원에서 과감히 로테이션을 돌렸다. 잘 관리된 잔디를 밟고 서서 공을 돌리고 있는 동료들이 왜 이리 부러운지 모르겠다. 빡빡한 일정 속에 지친 것도 사실이고 부상 때문에라도 한 경기 정도는 쉬어줘야 하는데, 천생 축구선수인지라 공만 보면 차고 싶어 몸이 근질거린다. 젠장.
“티켓 줘.” 차에 올라탄 정원은 운전석을 향해 무심히 손을 뻗었다. 어깨선보다 짧은 단발 머리를 겨우 묶어 검은 모자 안에 모조리 쑤셔 넣으니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웬만한 성인 남자만큼 큰 키에 야무진 몸태를 보고 누가 한 번에 여잔 줄 알까. 옷소매로 차마 가릴 수 없는 고운 손만이 그녀가 여자라는 유일한 증거다.
“어? 없는데?”
“없다니? 어제 분명 다 준비해 뒀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랬잖아. 티켓 못 구했으면서 일단 큰소리부터 치고 본 거야? 너는 어떻게 된 애가!”
“그런 게 아니야! 내 말을 좀 들어줘, 나도 피해자라고, 깜빡 속았어!”
“설마, 암표상 손아귀에서 멍청하게 놀아났니?”
“암표상보다 더한 사기꾼이 왔다 갔지.” 남생이 노랗게 염색한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헝클며 말을 이었다. “티켓, 성님이 가져갔어.”
“오빠가 왔었어!” 버럭 성질을 내는 정원의 반응에 운전석에 구겨 넣은 남생의 다부진 몸이 잔뜩 움츠러들었다. 누이를 닮은 다갈색 눈동자도 불안하게 요동쳤다. 일이 잘못됐음을 직감한 그는 정원이 차에 오르기 10분 전을 회상하며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티켓 줘, 내가 가.”
“누이가 허락했다고?”
“응, 일종의 로테이션이랄까?”
“진짜?”
“그렇대도?”라며 미성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세상의 선함이란 선함은 다 갖추고 태어난 듯한 미성의 유연한 혀 놀림에 또 보기 좋게 당했다. 그럼 그렇지, 유정원이 누굴 믿고 그럴 여자가 아닌데.
“누이가 성님한테 맡겼대서, 나는 이게 둘이 합의가 된 건 줄 알고…….”
“너 미쳤어? 이미성이 무슨 재주로 라커룸까지 가!”
그 말을 끝으로 정원은 차 문을 세차게 닫고 나갔다. 혼자 남겨진 남생은 뒷목을 긁적였다.
“누이도 참, 성님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단 말이야.”
티켓이 없다. 게이트 앞에서 검표 중인 스태프들을 지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방법은 포기해야 한다. 인파가 몰려 줄이 꽤 늘어선 참에 차라리 잘됐다.
무전기를 들고 정신 없이 어딘가로 향하는 안전요원의 헐렁한 점퍼 주머니에서 정원은 그의 출입 카드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는 관계자 외엔 출입이 금지된 구역으로 향했다. 주변을 슥 살펴본 뒤, 벽을 짚고 순식간에 펜스를 넘었다. 힘껏 차올린 두 다리와 체중을 버티는 완력으로 이뤄진 점프는 착지까지 완벽했다. 정원은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쓰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출입구까지 걸어갔다. 카드를 인식시키자 굳게 잠겼던 문이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정원은 자연스럽게 출입 카드를 목에 걸었다. 라커룸. 머릿속에 저장해 둔 건물 도면을 펼쳐야 할 때가 왔다. 속속들이 꿰고 있는 정도까진 아니어도, 안필드는 개중 익숙한 구장이라 임무를 수행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관건은 하나, 라커룸으로 가는 동안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것.
“제발 아무 일도 없어라.” 걸음을 재촉하는 정원에겐 겁도 없이 이 일에 뛰어든 미성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킥오프까지 30분, 시온은 교체 명단에 든 동료와 얘기를 나누며 라커룸으로 갔다.
“How’s your leg?”
(다리는 어때?)
“Fine, it’s nothing. Just gafffer doesn’t let me play, that’s all.”
(괜찮아, 별거 아니야. 감독님이 그냥 못 뛰게 하는 거야.)
“Yeah, he loves you.”
(그래, 감독이 널 아끼긴 하지.)
“I know.”
(내 말이.)
복도 저쪽 끝에서 걸어오는 남자에게 왠지 눈길이 가, 유심히 그를 관찰하기에 이르렀다. 옅은 갈색 머리에 남자치고 흰 피부, 이 공간과 괴리감이 느껴지는 외모의 동양인이었다. 주먹만 한 얼굴은 모자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딱히 안전요원 같지 않은데, 누굴까. 혹시 한국인?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말 걸 타이밍을 놓쳤다. 고개를 살짝 숙여 시선을 피하는 게 인사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천하의 정시온을 보고 그냥 지나치다니, 적어도 한국인은 아니군.
라커룸 근처까지 다다른 정원은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했다. 16:27. 경기 시작 3분 전, 선수들은 모두 더그아웃이나 입장 터널에서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라커룸을 향해 살금살금 걸어가던 정원은 문이 갑자기 열리자 황급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술냄새. 정원은 좁은 공간에 진동하는 알코올 냄새의 진원지를 단번에 파악했다. 화장실 안엔 후들거리는 다리로 소변기 앞에 선 남자 한 명뿐이었다. 천연이 아닌 듯한 노랑 머리는 왁스를 듬뿍 발라 뒤로 넘겼고, 보기 좋게 태운 피부엔 주근깨가 박혀 있었다. 쫙 빼 입은 옷이 죄다 명품인 걸로 보아하니 VIP쯤 되려나? 고주망태가 돼선 일보러 멀리도 왔다, 하필 여기서 마주칠 게 뭐람!
짧은 한숨과 함께 정원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궁금한 인물이었으나 중요한 인물은 아니었다. 그녀는 문에 귀를 대고 바깥 동정을 살폈다.
“Hey, you!”
(거기 너!)
그때, 등 뒤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정원은 돌아보는 대신 문고리를 잡았다.
“Stop!”
(멈춰!)
그러자 목소리가 더 단단해졌다. 하는 수 없군, 정원은 천천히 뒤로 돌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이 남자를 안다.
“Who are you, nah…… What are you?”
(너 누구야? 아니지…… 뭐야, 너?)
이 클럽 구단주의 개망나니 아들, 대니 맥과이어. 이 상황에서 만날 수 있는 최악의 방해꾼. 그는 정원이 흥미롭다는 듯 음흉한 미소와 함께 다가왔다. 검지와 중지로 모자의 챙을 위로 들어올리자, 정원의 얼굴이 오롯이 드러났다.
“Huh, stranger?”
(대답해 보지?)
취기 때문에 느릿해진 말투와 달리 눈빛은 매서웠다. 그의 두 손가락이 뺨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노닐다, 그대로 얼굴선을 쓸어내리더니 목 언저리의 잔머리를 톡 건드렸다. 여러 번 해본 솜씨다.
“You…… smell of a woman.”
(너한테서…… 여자 냄새가 나.)
정원은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Not really, I smell alcohol.”
(별로. 난 술냄새밖에 안 나는데?)
농담으로 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잠시 껄걸 웃더니, 대니는 정원을 벽 쪽으로 확 밀쳤다. 술에 취했어도 여자 하나쯤은 거뜬하다는 듯, 강한 악력으로 정원의 어깨를 붙들었다.
“I am asking, what the hell are you!”
(내가 묻잖아, 너 대체 누구냐고!)
“Dream, you cannot remember at all.”
(꿈, 넌 절대로 기억 못 할.)
“What?”
(뭐?)
대니의 급소를 가격하기 위해 무릎을 굽혀 다리를 올리려는데 화장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안으로 들어왔다. 시온이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을 목도하고도 그는 본능적으로 정원을 도우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어딜 끼어들어요!”
그런 시온에게 정원이 빽 소리를 질렀다. 앙칼진 목소리는 의외로 피치가 높았다. 여자? 아니 그것보다, “한국인?”
“그게 중요해요, 지금?”
생각만 한다는 게 말이 되어 입 밖으로 내뱉어졌다. 머쓱해진 시온이 다시 정원을 살폈다. “괜찮아요?” 멈춰 선 걸음이 다시 옮겨졌다.
“오지 말고 거기 딱 서 있어요! 무슨 꼴을 당할 줄 알고. 몸이 재산인 사람이 그 정도 의식도 없어요? 부상 때문에 오늘 경기도 못 나가면서.”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는 듯한 뉘앙스였다.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시온은 생각 없는 행동으로 질타 받은 호의에 대해 해명했다. “난 그냥 도와주려고 그런 건데.”
“됐으니까…….”
“그냥 가요”라고 하려는데 대니가 정원의 어깨를 세게 누르며 그녀의 시선을 되찾아갔다. 시온의 등장 이후 그는 정원에게 철저히 투명인간 취급을 받았다. 그 잠깐의 무시가 제법 기분을 상하게 한 모양이다. 목소리에 불쾌감을 듬뿍 담아, 그는 제가 한 질문에 대한 답을 정원에게 강요했다.
“Answer me first, Korean girl.”
(내 말에 대답부터 해, 한국인 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