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 일찍부터 은호에게 왔다. 나는 늘 같은 시간에 나의 세계에서 나오지만, 여기 시간은 매번 다르다. 해는 벌써 떴고, 바람은 아무 흔적도 보이지 않았고, 나무는 빠짐없이 초록으로 가득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더위 걱정에 벌써 지친다고 했다.
‘더위라...’
나는 그게 어떤 느낌인지 모른다. 덥다, 춥다라는 게 나의 세계에서는 없는 듯하다. 아직까지 나는 경험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마 없겠지. 나는 잘 아는 게 없다. 그건 확실하다.
나는 이른 시간임에도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사람들은 햇빛을 피하기 위해 그늘을 찾는다. 얼마나 뜨거운지 궁금해졌다. 나는 손을 내밀어 보았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손을 바라보았다. 햇빛에 나의 손은 투명해보였다.
‘이래서 내가 안 보이는 건가?’
나는 은호의 집으로 향했다. 은호의 아파트 경비실에서 은호의 이름을 누군가 말하고 있다. 잠시 후 누군가가 나왔다. 나는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알지 못하는 얼굴이었지만, 느낌은 좋았다. 그 사람은 나의 옆을 스쳐지나갔다. 얼마 후 경비실에서 벨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곧 내려 갈게요.”
은호가 내려온다기에 여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좀 전보다 햇빛의 세기가 더 강해진 것 같다. 주위의 모든 것들이 자신의 색이 사라질 만큼, 햇빛처럼 환하게 보였다. 그리고 벌레 우는 소리가 심하게 반복되고 있었다.
저기서 온갖 인상을 찌푸린 은호가 걸어온다. 얼굴을 향해 손을 반복적으로 까딱거렸다. 나도 은호를 따라한다. 나는 아무 느낌이 없다.
은호는 경비실에서 무언가를 들고 집으로 향했다. 나는 은호를 따라 갔다. 역시나 은호네 집은 어둡다. 그래도 창문은 열어 놨다. 커튼이 펄럭일 정도면 생각보다 바람이 많이 들어오는 것 같은데, 아니었다. 선풍기 바람이었다. 은호는 들고 온 물건을 바닥에 두고 선풍기 앞에 앉았다. 바람이 은호의 머리카락을 날린다. 엄청 센 바람이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은호는 받아 온 물건을 들고 식탁으로 갔다.
은호는 물건을 식탁에 두고 숟가락, 젓가락과 접시를 가지고 왔다. 그게 무엇인지 열어보지 않아도 아는 듯 했다. 뚜껑을 연 그 물건 안에는 여러 가지 음식들이 담겨 있었다. 은호의 얼굴에서 살짝 웃음이 보였다.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았다. 먹어보지 않아도 분명 맛있을 것 같았다. 은호는 접시에 음식들을 담았다. 그리고는 뭔가 생각난 듯이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걸었다.
“이모, 음식 받았어요. 고마워요.”
“오늘만이라도 맛있게 먹어야지. 이모가 너한테 직접 주고 가야했는데, 이모가 바빠서 미안해.”
이모는 바쁜 것에 대해 은호에게 미안해했다. 확신할 수 없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 무언가를 가득 참는 듯 했다.
“이모, 잘 먹을게요. 진짜 고마워요. 이모...”
은호도 무언가 모르게 많이 참아가며, 눌러가며, 애써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정민이가 같이 만들었다고 꼭 전해달래.”
은호는 그제서야 웃었다.
“안 그래도 제일 먼저 문자했어요.”
그렇게 은호와 이모는 웃었다. 그리고 이모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은호야, 생일 축하해.”
‘생일?’
은호의 표정이 약간 흔들렸다.
“고마워요. 이모”
은호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생일이면 좋은날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그러나 은호는 그렇게 좋지 않은 듯 했다. 어린 아이치고는 심하게 걱정될 정도로 삶이 어둡다.
은호는 언제 심각했냐는 듯 음식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나도 진심으로 먹고 싶을 만큼 맛있게 먹었다. 혼자서 저렇게 열심히 먹는 모습은 거의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은호는 먹는 중에도 바빴다. 머리도 흔들었다가, 콧노래도 불렀다가, 눈 주위를 옷으로 닦기도 했다.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는 행동들이었다.
“생일 뭐 별건가?”
혼잣말도 몇 번이나 했다. 내가 보고 있는 그 모습이 내 마음을 쿡쿡 쑤셨다. 이런 감정은 이 세계에서는 나에게 필요 없는 부분이었다. 그런데 은호의 모습은 자꾸만 그런 감정들을 생겨나게 했다.
‘얘 뭐지...’
은호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먹은 것을 정리했다. 그리고는 다시 선풍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앉았다. 한참을 선풍기 바람과 노는 것 같았다. 가까이 얼굴을 대고는 이상한 소리도 내어보고, 바람의 세기도 바꿔보고, 그리고 울리지 않은 휴대폰으로 시선을 몇 번씩 주었다. 휴대폰의 화면을 켰다 껐다 반복했다.
그리고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은호는 예상했다는 듯 살짝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눌렀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읽었다. 좀 전의 다양한 표정들은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은호 특유의 표정, 아니 무표정만이 얼굴에 남아 있었다.
은호는 나갈 준비를 했다. 다행히 오늘의 주의사항은 없었다. 그래도 은호의 표정을 보면 뭔가 일을 만들 것 같아서 살짝 불안했다.
은호는 날씨 때문인지 많이 지쳐보였다. 얼마 간 걷던 은호는 집 근처 가게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좀 전에 은호는 먹었기 때문에, 설마 또 먹으러 온 것은 분명 아닐 것이었다.
은호는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나도 은호를 따라 둘러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은호?’ 라는 말이 나왔다. 분명 은호는 내 옆에 있는데 나는 또 다른 은호를 본 것 같았다. 은호도 드디어 그 사람을 봤다. 은호가 그쪽으로 걸어갔다. 은호가 오는 것을 본 그 사람은 은호를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좀 많이 어색해 보였다.
“은호야, 일찍 나왔네. 미안해. 엄마가 이렇게 밖에 못해서.”
‘엄마?’
나는 은호의 엄마를 한참 바라봤다. 정말 은호랑 비슷했다. 또렷한 눈과 동그란 코와 꼭 다문 입모양 그리고 살짝 보인 미소가 은호랑 똑같았다. 그런 엄마를 은호는 정면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엄마는 은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그 눈빛이 그냥 슬퍼보였다. 나는 그 둘의 모습을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고 있다.
“은호야, 주영이 이모가 해준 음식 먹었어?”
은호는 고개만 끄덕인다.
“은호야.”
은호 엄마는 은호의 이름만 부르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눈빛이 흔들렸고, 눈이 무언가로 반짝였다.
“생일 같은 거 안 해도 괜찮아요.”
은호의 말에 은호 엄마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흘렀다.
“정말이에요. 생일 지나고 보니까 아무것도 아니더라구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하는 은호는 역시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은호의 말을 들은 엄마는 겨우 고개를 들어 은호를 봤다. 엄마랑 눈이 마주친 은호의 표정이 순간 움직였다. 은호의 엄마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도 그렇게 한참을 그들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