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럴 리 없습니다.
- 그럴 리 없다?
- 네. 이 준 학사는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김 재화는 확신을 갖고 단정하고 있었다.
강 바울은 재화를 또렷하게 보며 재차 물었다.
- 그런 사람이라니? 어떤 사람이 아니란 말이지?
- 이 준 학사는 절대로 애인 따위를 만들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순간 김 재화 학사의 언성이 날카로워진다.
울긋불긋한 볼에는 몹시 불콰한 표정이 스친다.
강 바울은 재화를 미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좀전까지 시종일관 담담하게 답하던 재화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지자 의구심이 인다.
'이상하군. 자기의 치부를 건드리는 질문도 아닌데 왜 이준 학사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격하게 반응하는가.'
강 바울이 재화 앞으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그러자 재화는 바싹 깃을 세운 공작처럼 정좌세를 취한다.
마치 강 바울이 던진 어떤 질문이든 완벽하게 방어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걸 보면, 뭔가 들키고 싶지 않는 것이 있다는 의미인데. 좀 더 깊이 캐 볼 필요가 있다.'
- 사건 당일 저녁에 대해서 묻고 싶네.
- 네.
- 그날 자네도 외출을 했지?
- 그렇습니다.
- 자네와 민건 학사, 강 학사, 그리고 이 준 학사가 함께 술을 마셨다고 들었네.
- 네.
- 그 자리에서 이 준이 애인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는데?
- 저는 그런 말 못 들었습니다.
- 자네가 나간 뒤에 나머지 셋이서 나눈 대화일 수도 있지.
- 아니요. 잘 못 들은 겁니다.
- 민건 학사와 강 학사 둘 다?
- 네. 둘 다 잘. 못. 들은 겁니다!
재화가 다시 격양된 목소리로 강하게 대답한다.
- 두 명 다 한꺼번에 잘못 들었다는 건 말이 안되는데?
- 신부님이 두 학사에 대해 잘 모르셔서 그러는 겁니다.
- 두 학사에 대해 내가 잘 모른다? 뭘 모른다는 의미지?
- 그 두 놈은 우리가 도착하기 이전부터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돼 있었습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벌써 옆 자리의 여자들을 힐끔거리며 저속한 농담을 던지고 있었구요!
- 저속한 농담?
- 여자들 사이즈가 어떻고. 아무튼! 그 놈들은 지들이 나눈 더러운 이야기가 새어 나갈까봐 이 준 학사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겁니다.
민건 학사와 강 학사가 여자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과연 김 재화의 주장이 맞을까?
만약 김 재화의 주장이 맞다면 두 학사는 강 바울을 나쁘게 해한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민건 학사는 감정적으로 약하고 여린 스타일. 폭력을 행할 수 있는 인물 유형이 아니다.
- 두 사람의 거짓말 여부는 좀 이따 강 학사를 통해 다시 확인해보겠네.
- 사건 당일 술집에서 성대 여대생들과 자리를 함께 했는지 확인해보세요.
- 성대 여대생?
- 네, 7시 지날 무렵, 옆 자리의 여대생 두 명과 합석했습니다.
- 자네는?
- 전 그런 자리 질색입니다. 학사 신분에 여자들과 미팅이라니.
- 이성간의 만남은 신부에게도 필요하다고 보네만
- 신부님은 이성간 친구가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 자네는 아닌가.
- 성서에 기록된 대로 입니다. 여자는 악의 근원이죠.
- 너무 고루한 발상이구만. 성서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건 대단히 위험해.
- 단순히 자의적 해석이 아닌 것은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요한의 목을 요청한 헤로데의 딸부터 무수히 많은 기록들이 있죠. 근래 우리나라를 보세요. 여성대통령의 밀실정치로 망조가 들었지 않습니까.
강 바울은 입을 다문다. 재화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재화가 지금 토로한 대화들은 김 재화라는 인물을 파악하는데 대단히 유용했다.
여자에 대한 거부와 성적인 이야기들에 대한 격한 반응, 성차와 젠더의식의 고루함.
김 재화는 전형적인 신학생이다.
아직 품을 받지 못한 열정적인 학사가 대부분 이런 자세를 취한다.
목에 깁스를 한 것처럼 당장이라도 가톨릭 사제가 된 듯 세상에 오만한 태도를 취할 수 있으니까.
- 젊은 혈기에 여자들을 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당연하지. 우리 때도 종종 그랬다네.
순간 재화의 얼굴에 혐오감이 인다
강 바울은 그 표정을 놓치지 않는다.
강 바울은 재화를 더욱 자극해볼 셈이다.
- 요즘 신학생들에게 애인은 필수품이라던데? 더군다나 이 준 학사의 실물이 꽤 준수하다더군. 신학교내 여학생들한테도 인기가 많고. 그러니 당연히 애인 하나쯤 있지 않을까? 물론 결혼을 할 수는 없지만 잠깐 기분이라도 낼 그런
-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단언할 수 있어요. 이 준 학사는 사제의 길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학교에서도 줄곧 수석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학사의 고결한 품위를 그깟 여자 때문에 버릴 사람이 절대로 아니죠! 이 준 학사는 다른 놈들이랑 달라요. 다른 놈들처럼 한가하게 엔조이 할 사람이 아니라구요. 완벽한 신학생이라 이 말입니다!
- 완벽한 신학생?
- 완벽함은 무결함에서 나옵니다. 흠 없고 티가 없는 그런 신학생이 바로 이 준 학사입니다.
강 바울은 잠시간 침묵한 채 재화의 얼굴을 다시 뚫어지게 바라본다.
완벽함은 무결함에서 나온다...
실소가 터진다.
영락없이 큰 아버지인 총장신부를 빼다 박았다.
얼마나 교의적인 발언인가.
교리와 율법과 형식에 얽매인 그야말로 형식주의의 신앙인의 모습.
그러나 인간적인 감정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얼음같은 서늘함.
4년전 강 바울이라면 격하게 따지고 논쟁했을 것이다.
형식적인 박애가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는 사랑을 가질 때, 그 모습이야말로 참 신학생이라고.
강 바울이 침묵을 고수하며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자 재화는 갑자기 당황했다.
자신도 모르게 과격한 반응을 보인 듯 싶어 후회가 밀려온다.
더욱이 꿰뚫을 듯 자신을 살피는 강 바울의 시선은 견딜 수 없을만큼 불편했다.
- 준이 형은 좀 어떤가요?
강 바울이 미간을 좁히며 침묵한다.
준이 형 이라... 좀 전까지 꼬박꼬박 이 준 학사라고 칭하던 재화의 모습이 갑자기 좀 달라 보인다.
강 바울은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총장신부의 조카라는 이유로 김 재화에게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것은 아닌지.
방금 전 이 준의 안부를 묻는 녀석의 얼굴에는 걱정과 우려가 여과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 준이 형을 면회하고 싶습니다, 신부님.
- 솔직히 말하면 이 준의 상태는 좋지 않네.
- 많이 안 좋습니까?
- 말을 하거나 누군가와 만날 상황이 아닐세. 정서적으로도 몹시 불안정해서 요주의 상태야.
- ... 그렇더라도 형은 아마도 저만은 만나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 지금은 모든 사람이 그에게 공포 자체야. 누구도 예외일 수 없어.
- 형에게 모두가 공포라뇨? 무슨 말씀이신지?
- 이 준은 자신을 가격한 사람이 신학교 안에 있다고 진술했네.
- 네?! 그럼 범인이 누군지 안답니까?
- 얼굴은 보지 못했다는군.
- 어떤 놈인지 알면! 정말... 그 놈을 제가....
죽여 버릴 겁니다...
재화는 말꼬리를 흐렸지만, 강 바울은 분명히 [죽여 버릴 겁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것 같았다.
범인을 향한 재화의 증오가 그만큼 강하게 다가왔다.
- 수요일 저녁에 술자리에 대해서 더 이야기해보지.
- ... ...
- 민건 학사와 강 학사는 7시 전후 성대 여대생과 합석을 했고? 이 준 학사도 같이 합석했나?
- 석우가 일방적으로 여대생을 끌고 왔습니다. 저와 준이 형은 아주 불쾌한 상황이었습니다.
- 이 준도 불쾌했단 말이지?
- 네, 형도 분명히 그랬을 겁니다.
- 그렇군. 그러면 합석한 뒤에 어떤 일이 있었지?
- 아무리 불쾌해도 처음 보는 낯선 여자들에게 갑자기 무례하게 굴 수는 없었죠. 대략 20분 정도는 준이 형과 술만 마셨습니다.
- 음. 7시20분 정도까지는 넷이 함께였다?
- 그 뒤에 서로들 화장실에 한번씩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먼저 술자리에서 나왔습니다.
- 먼저 나와서 누굴 만났나.
- 아무도요.
즉답을 했다, 망설임 없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의미다.
강 바울은 재화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연속적인 질문을 던져본다.
- 신학교에 귀가한 시간은?
- 교칙에 맞춰서 정각 8시에 들어왔습니다.
- 맥주 집에서 문자를 받았다고 하던데 보여줄 수 있나?
- 잘못 온 문자라서 지웠습니다.
- 문자 내용은 뭐였나?
- 스팸광고였습니다.
- 내용은?
- 대출관련 내용이었습니다.
- 상세히 말해보게.
- 자세히 보지 않았습니다. 대출이라는 글자만 보고 바로 지웠습니다.
- 문자 때문이 아니라면 술자리에서 왜 먼저 일어났지?
-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교칙은 정각 8시 귀가라구요.
- 교칙 때문이다?
- 우리는 완벽한 신학생입니다. 얄팍하게 개구멍 따위로 드나들며 연기하지 않습니다.
- 우리는? 그렇다면 이 준도 함께 들어왔나?
- 아뇨, 따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확신합니다. 이 준 학사도 제 시간 안에 귀가했을 겁니다.
- 8시 귀가 후에 어디 있었나?
- 제 방에 있었습니다. 저녁 9시쯤에는 성무일도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 그렇다면... 8시 이후부터는 줄곧 자네 혼자였군.
- 네.
- 자네를 본 다른 사람은 없나?
- 네.
강 바울은 다시 한 번 재화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생각했다.
'저녁8시에서 사건발생 시간까지 김 재화의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사람은 없다.'
* * *
맞은 편의 신학생은 초조해보였다.
다리를 떨며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동공을 굴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 바울은 묵묵히 맞은편의 신학생을 지긋이 바라보고만 있었다.
강 석우 학사. 김 재화와 동갑이다.
명문 본당의 4학년 학사이며 수재는 아니더라도 상위권에 드는 모범생 타입이다.
하지만 지금 정좌하고 긴장된 모습으로 앉아있는 겉모습은 가면일 수도 있다.
강 바울은 강 석우 학사의 방을 휘둘러보며 물었다.
- 클래식 기타를 치는군.
- 예, 그렇습니다.
- 연주해볼 수 있나?
- 지금요?
- 응, 자네가 연주하고 싶은 곡 아무 거나.
강 석우 학사는 망설임도 없이 벌떡 일어나 클래식 기타를 집었다.
그리고 자리에 앉아 Perhaps Love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잠시 떠는가 싶더니 이내 존 덴버의 기타 선율을 곧잘 흉내낸다.
아름답고 능숙한 연주다.
강 바울의 얼굴에 미소가 인다.
클래식 기타를 집으면 대부분 [로망스]를 연주한다.
그런데 요놈은 고전 팝송을 연주하고 있다. 다분히 끼가 많고 재기 넘치는 녀석이다.
- 잘 들었네.
- 아닙니다. 원하시면 또 다른 곡도 해볼까요?
긴장이 풀렸는지 강 석우 학사가 능청을 떨어본다.
멍석만 깔아주면 어디서든 분위기를 리드할 엔터테이너 스타일이다.
강 바울은 고개를 저으며 거절의사를 표시하고 질문을 던졌다.
- 개 사육장 CCTV를 봤네. 사육장 담당이 아닌데도 자네가 종종 오더군.
- 아, 네. 준이 형 도와주려고 간 겁니다.
- 이 준 학사도 사육장 담당이 아니라던데?
- 준이형은 사육장 담당인 박 은호 학사 도와주러 간 거구요.
강 석우 학사의 진술은 꾸밈없이 보인다.
실제로 CCTV속 석우는 이 준을 도와 사육장 오물을 치우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 자네와 민건 학사, 이 준 학사는 꽤 친한 모양이군.
- 우리 넷은 절친이죠. 베스트 프렌드요. 힛.
- 넷? 아 김 재화 학사도 포함하는 건가?
- 그럼요! 재화가 부회장 정도 됩니다, 우리 모임에서는.
- 그런데 왜 재화는 사육장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지? 자네나 민건 학사는 이 준을 종종 도와주던데.
- 아... 재화는... 좀 결벽증이... 개 알러지가 있어요.
- 알러지?
- 네.
강 바울은 머릿속 기억의 창고에 '김 재화 알러지'라는 단어를 저장해 둔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
- 이 준 학사에게 애인이 있나?
- 예?
- 질문 잘 알아들었을 텐데. 민건 학사가 말해주더군, 이 준 학사가 애인을 만나러 간다고 했다구.
- ... 으유 민건 이 자식.
- 사실이군.
-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수요일에 형이 애인 만나러 간다고 말한 건 맞습니다.
- 예전에도 이 준이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나?
- 가끔은 종종이요. 신부님, 형이 그날 그렇게 말한 게 진담인지 농담인지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
- 그래?
- 제가 보기엔 농담 같기도 했구요.
- 왜 그렇게 생각하지?
- 형이 원래 다감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입니다. 식복사 언니들이랑 신학교 여학생들이랑도 친하구요. 곧잘 그러죠. 모두 다 사랑하는 사람이라구요. 박애주의자예요 형 스타일이. 그런 형을 어떤 자식이 그렇게 만든 건지! 근데요 신부님 범인은 누구예요?
- 범인은 아직 알 수 없네.
- 신학생 중에 한 명이라는 소문이 사실인가요?
- 모르지.
- 에이. 신부님은 아시는 거죠? 그쵸?
- 강 석우 학사.
- 네! 신부님!
강 바울이 진지한 표정으로 정색하고 석우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강 석우 학사는 긴장된 표정이 된다.
- 용의자로 치자면 자네가 두번째 용의자야.
- 예?! 저 아닙니다! 제가 형한테 왜 그런 짓을 해요! 말도 안돼요!
- 그러니까 진지하게 자네 혐의를 벗어봐.
- 아 네! 죄송합니다. 진지하게!
- 사건 당일 맥줏집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보지. 김 재화 학사가 그러더군. 자신은 교칙을 지키기 위해 정확히 8시 전에 귀가하려고 먼저 나간 거라고.
- 예, 재화는 늘 그랬죠.
- 김 재화 학사 말이, 이 준 학사도 교칙에 충실하기 위해 먼저 일어났다고 했네.
- 재화가요? 둘은 각자 따로 나갔는데요? 재화가 먼저 나갔습니다.
- 알고 있네. 하지만 김 재화 학사 말이, 이 준도 교칙에 충실하기 위해 먼저 일어났을 거라고 단언하더군.
- 그건...
강 석우 학사가 고개를 갸웃한다.
재기발랄하고 끼가 많은 친구들은 의외로 기억력이 좋다.
어쩌면 강 석우 학사가 뭔가를 본 것은 아닐까?
- 뭔가 이상한 게 있나?
- 딱히 꼭 그런 건 아니지만요.
- 때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이라는 게 정확할 때가 있지.
- 하지만 이건 순전히 제 생각이라서요. 그래서 말씀드리기가 좀
- 감안해서 듣겠네. 뭔가 미심쩍은 게?
- 제 생각에는 준이 형이 재화를 따라 나가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 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
- 우선 그 날 재화가 술자리에서 일어난 건 7시 40분 경입니다. 평소보다는 15분 정도 일찍 일어났거든요.
- 맥줏집과 신학교 거리가 가까운가?
- 네, 5분 거리입니다. 그래서 평소때는 7시55분까지 술을 마셔요. 그런데 그날은 재화가 더 일찍 일어난 거죠.
- 왜 그랬지?
- 그 날, 재화가 핸드폰 문자를 보더니 얼굴이 굳더라구요.
- 핸드폰 문자?
- 네. 그것 때문에 이 준 형과 뭐라고 소곤거리는 것 같았어요.
- 자네 그 문자 내용 봤나?
- 재화가 황급히 지우더라구요.
- 못 봤군.
- 실은 조금 봤어요.
강 바울의 얼굴이 일순 환해진다.
문자 내용을 봤단 말이지!
- 그래? 어떤 내용이었지?
- 기다린다, 고 시작하는 문자였습니다.
- 기다려?
- 네, 제가 얼핏 보기는 했지만 분명히 기다린다, 뭐 이런 내용으로 시작했어요.
* * *
띠. 띠. 띠.
병실에는 기계음이 울리고 있었지만 며칠 전보다는 훨씬 더 간소했다.
‘다행히 몇 가지 장치는 떼었군.’
강 바울은 맞은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병실 베개에 허리를 기댄 채 이 준이 앉아있었다.
얼굴에는 여전히 미라처럼 붕대를 감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기계 장치에 의존하며 불규칙한 호흡으로 힘들어하던 이틀 전 모습보다는 훨씬 안정돼 보인다.
- 훨씬 좋아 보이는군.
[온 몸에서 피 비린내가 나는 데도 말입니까?]
이 준이 태블릿 PC에 입력한 답에는 신경질이 묻어나고 있었다.
- 자네 상처 때문에 괴롭고 힘들겠지. 그 고통 이해하네.
[붕대를 갈 때마다 차라리 죽고 싶습니다.]
- 이 준 학사, 그건 신학생이 해서는 안될 말이야.
[... ...]
- 범인이 잡힐 때까지는 초조하겠지. 자네 심정은 충분히 알아. 하지만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되네.
[일평생 괴물처럼 망가진 얼굴로 살아야 할 목숨따위... 원하지 않습니다.]
- 그렇게 만든 범인을 잡아야지. 그래서 자네에게 몇 가지 물어보려고 하네.
[질문을 왜 제게 합니까. 가서 범인에게 하세요]
- 여자 친구가 있나?
순간 이 준의 손가락이 태블릿 자판에 그대로 멈췄다.
허공에 멈춘 하얗고 긴 손가락은 마치 피아노 연주를 위해 심혈을 기울이듯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하지만 강 바울은 무엇보다도 붕대 사이로 보이는 이 준의 눈빛에 기이함을 느낀다.
슬픔과 연민, 고통스런 눈빛이라니!
여자친구라는 단어에 왜 슬픔과 연민의 반응을 보이는가.
잠시 숨을 고르던 이 준이 부정하듯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 수요일 저녁, 맥줏집에서 김 재화랑 같이 나갔나?
[아니요.]
- 김 재화 학사를 뒤따라 나갔다던데?
[아닙니다.]
- 그럼 왜 일찍 나갔나?
[8시까지 귀가하기 위해서입니다.]
- 교칙을 지키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판에 박은 듯이 김 재화 학사랑 같은 답이다.
강 바울은 고개를 젓는다.
분명히 맥줏집에서 나간 뒤와 신학교 복귀 사이에 뭔가가 있을 것 같은 꺼림직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 재화는 자네가 완벽한 신학생이라고 말하더군.
[전... 완벽하지 않습니다. 흠결이 있는... 평범한 인간이죠.]
- 그럼 김 재화 학사는 어떤가?
- 좋은 신학생이죠.
- 완벽한 신학생은 아니고?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 자네를 흠모하는 사람들이 신학교에 많더군. 백 신부님을 비롯해서, 자네 친구들까지 모두 다 한결같이 자네를 완벽한 신학생이라고 말하더군.
[저에 대한 평가가 사건과 관계가 있습니까]
- 난 있다고 보네. 자네의 얼굴만을 집중적으로 가격한 자는 분명 자네에게 원한이 있는 자야. 엄청난 고통을 일평생 지우려는 응징, 복수를 목적에 둔 자일세.
[도대체 누가 저를... 전 누군가에게 원한을 산 적이 없습니다.]
-사건 당일 맥줏집에서 김 재화 학사의 문자를 봤나?
[문자요? 무슨 문자... 아뇨. 전 보지 못했습니다.]
- 정말인가?
[네. 재화의 표정이 이상해서 이유를 물어본 게 전부입니다.]
- 김 재화 학사는 스팸 문자라고 하더군.
[... ...]
이 준이 침묵하는군. 뭔가에 대해 생각을 정리하고 있어. 그게 뭘까.
강 바울은 이 준의 표정을 살필 수 없어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상대방의 표정과 억양을 보면 그 사람의 불안과 거짓말 참말의 여부를 한결 가리기가 쉬울텐데.
오직 태블릿에 입력하는 이 준의 답을 보며 그 행간의 의미를 짚어야하는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는 상황이었다.
- 김 재화 학사에 대한 자네 의견을 상세히 듣고 싶네.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좋은 학사입니다.]
- 어떤 점에서? 여자를 멀리하고 신학공부에 우수하다는 점에서? 아니면 명문본당이라는 점에서 그러한가?
[신부님, 제게 정말 궁금한 게 뭡니까.]
- 김 재화 학사가 8시에 신학교에 귀가한 모습은 교문 CCTV에 정확히 찍혔네. 하지만! 자네는 그날 8시 20분에 귀가했더군.
[... ... 실수였습니다. 시계를 잘못 봤습니다.]
- 자네는 한 번도 교칙 감점을 당한 적이 없네. 그런데 지난 4년간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실수를 하필 그날에 했단 말인가?
[... ... ]
- 이 준 학사. 범인을 잡아달라고 날 부른 건 자네야. 그런데 왜 내게 뭔가를 숨기는 거지?
[전... 아무 것도 숨기지 않습니다.]
- 그럼 다시 한 번 묻겠네. 맥줏집에서 나간 뒤, 그 직후에 일어난 일, 그게 뭔가. 도대체 누구를 만난 건가.
이 준이 잠시 허공을 올려다본다.
그러더니 뭔가를 결심한 듯 태블릿 PC에 글자를 입력하기 시작했다.
[레. 아.]
-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