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이름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태연하게 웃으며 내 목소리에 놀랐을 시녀들을 진정시켰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그저 특이한 사람들을 발견해서 조금 놀란 것뿐이네."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다시 한 번 그들의 이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노엘과 일리아나. 그들은 과거에 나와 친했던 사용인이자, 함께 샤르레지나의 단죄와 멸망을 주도했던 나의 최측근들이었다.
혹시나 동명이인이 있을까 명단을 다시 한 번 훑어보았지만, 그 어디에도 그들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내가 알던 사람들이라는 것이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그것에 희망을 걸어볼 만한 일이었다.
“지금 이 명단에 있는 자들은 어디에 있지?”
“오늘부터 바로 입궁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전원 별궁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그럼, 노엘과 일리아나라는 사람을 데려오렴. 그들을 직접 만나보고 결정해야겠다.”
“예.”
시녀는 내가 일을 맡겼다는 것이 기쁘다는 얼굴로 그들을 데리러 나갔다.
나는 명단 속에 쓰여 있는 그들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새기며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을 기다렸다.
그들과의 만남을 기다리며 남은 일들을 처리하는 사이, 어느새 시간이 흘러 그들이 도착함을 알려주는 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찾으신 이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
시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문을 활짝 열었다.
“제국의 달이신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앞으로 걸어 나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여인들을 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깨 정도까지 내려오는 금발에 바다 같은 남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과 찰랑이는 은발과 푸르른 녹색 눈동자를 가진 여인.
노엘과 일리아나. 바로 그들이었다.
지옥 같았던 과거도, 새롭게 얻은 이번 삶도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었다.
“일어나라.”
반가운 마음에 단숨에 달려가 그들의 품에 안기고 잎은 것을 꾹 참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 그대들을 부른 것은 얼마나 전속 시녀에 어울리나 확인하기 위해서네.”
“예.”
내가 낼 문제는 그들만을 위해서 만든 문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들이라면 손쉽게 맞출 수 있는 문제였다.
“그대들에게 가장 귀한 것을 내게 주게. 그것을 보고 그대들을 뽑을지 말지 결정하겠네.”
한 시녀가 당황하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화, 황후 폐하, 물건을 갈취하시면 벌을 받으시지 않습니까?”
“괜찮네. 어차피 다시 돌려주면 되니.”
나는 잔뜩 기대하는 눈빛을 한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제 뭐라고 대답할 거야? 나랑 가장 가깝게 지냈다면 뭐가 가장 귀한 것인지 잘 알고 있을 거 아냐?'
둘은 잠깐 눈빛을 주고받더니 일리아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저 자신을 드리겠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은 원하는 것을 찾으며 스스로 움직이는 저 자신입니다. 만약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가 된다면, 이 한 몸을 다 받쳐 도움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곧바로 노엘이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저는 제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제게 가장 소중한 것은 제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게 해준 제 생명입니다. 만약 황후 폐하의 전속 시녀가 된다면, 제 생명을 받쳐 황후 폐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들의 말을 다 듣자, 그들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환희와 여전히 만족스러운 대답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똑같아. 그때와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이 환희에 찬 미소를 만족감에 의한 미소로 바꾸며 고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 다 너무나도 귀한 것을 주었군. 매우 맘에 들어.”
나는 고개를 돌려 옆에 있던 시녀를 바라보았다.
“사라, 전속 시녀의 일이 언제부터 시작이지?”
“오늘부터입니다.”
“오늘?”
“예, 폐하께서 하루 빨리 전속 시녀를 곁에 두셔야 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아, 그러셨군.”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며 눈치를 살피고 있을 그들을 바라보며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그럼, 노엘, 일리아나. 바로 전속 시녀로서 일해줄 수 있나?”
“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로써 과거에도, 지금도 항상 내 곁에는 노엘과 일리아나가 함께 있게 되었다.
***
그들이 나가자마자 한 시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황후 폐하······. 나머지 후보들을 그냥 보내셔도 괜찮을까요?”
“아아.”
전부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뭘 말하는 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이름난 가문의 영애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공작 영애까지 후보에 있었다.
그런 그들을 그냥 보내면 혹시라도 내게 해가 끼칠까 염려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을 남겨두면 내가 아니지!
“원래 가문명은 절대 쓰지 않는 게 원칙이고, 위로의 의미에서 꽃을 선물했으니 그건 괜찮네.”
시녀는 내 대처에 감탄하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역시 황후 폐하십니다! 괜한 걱정을 하여 송구하옵니다!”
“걱정해줘서 고맙네.”
나는 마지막 서류에 서명을 하고는 의자를 뒤로 밀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겨우 일이 다 끝났네.”
“황후 폐하, 목이 마르시진 않으세요? 차를 준비할까요?”
“홍차로 부탁하네.”
“네!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시녀가 나간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턱을 괴고 배시시 웃었다.
“흐흥, 이제 조금만 있으면 같이 있을 수 있겠네.”
빨리 노엘과 일리아나를 보고 싶어 설레는 마음으로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
“황후 폐하, 전속 시녀가 된 자들을 모셔왔습니다.”
“그래, 들어와라.”
시녀가 타준 차와 함께 그들은 쪼르르 들어와 인사를 했다.
“지금부터 황후 폐하를 모실 전속 시녀, 일리아나 데 플뤼오르와-”
“노엘 드 아스트리스입니다.”
“그래. ······어?”
그들의 정식적인 소개를 들은 후,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플뤼오르와 아스트리스는 각각 백작가와 공작가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에······백작 부인과 공작 영애라니······.’
나는 필사적으로 놀람과 당황을 감추며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흠흠, 그래. 앞으로 잘 부탁하네.”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황후 폐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 차를 한 모금 마시려고 할 때, 문 밖에서 다급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 폐하, 폐하께서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그래, 바로 가겠다.”
차를 마시지 못한 것은 아쉬웠지만, 그것이 아벨보다 우선이 될 수는 없었기에 찻잔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폐하께서 무슨 연유로 나를 찾으셨는가?”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와 함께 시찰을 나가신다 하셨습니다.”
그는 앞장서서 쭉 걸어가다가 하얀 문 앞에 멈춰섰다.
“이 방에서 미리 준비하고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알았네.”
그가 문을 열어주자, 방 안에는 미리 옷을 갈아입고 시찰을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아벨이 서 있었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그래, 황후. 오늘은 같이 시찰을 나가려 불렀네. 옷은 여기에 준비해뒀으니 와서 갈아입게.”
“예.”
노엘과 일리아나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는 시찰에 필요한 물건들을 챙겼다.
“그럼, 모두 물러가라. 황후와 단 둘이 가겠다. 혹시 모르니 소수만 멀리서 따라오도록.”
“예!”
모두 방을 나가고 단 둘이 남자, 그는 내게 부드럽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처음으로 단 둘이 나가는 거잖아······.”
“네.”
“시찰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연인끼리 보내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그렇게 말하는 그의 귀가 조금 붉어지더니 이내 얼굴도 붉게 물들었다.
아으, 귀여워. 세상에 이런 귀여운 사람은 또 없을 것 같아.
나는 그의 손을 잡으며 사르르 미소 지었다.
“네, 아벨.”
내 대답에 그는 얼굴을 더욱 붉히며 비밀통로로 가는 길에 앞장섰다.
“잘 따라와야 해?”
“네.”
그는 앞장서서 비밀 통로를 가로질러 가면서도 혹시 내가 겁을 먹거나 심심할까봐 계속 말을 걸어주었다.
“혹시 무섭진 않아?”
“네, 괜찮아요.”
“음, 이제 거의 다 왔어. 이 문만 열면 돼.”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
그는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기 전,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 문 밖에서는 나를 에디라고 불러줘. 내가 자주 쓰는 가명이야.”
에디라는 말 한 마디에 그와의 추억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저는 그냥 리즈라고 불러주세요.”
마치 처음 그와 만났을 때처럼, 악독한 황가를 단죄할 계획을 세웠던 날처럼 다정하게 서로의 이름을 일러뒀다.
그때에는 사뭇 비장한 느낌이 감돌았지만, 지금은 그저 애정이 넘쳐날 뿐이었다.
“그래, 리즈.”
그는 살포시 웃으며 잔뜩 기대하는 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며 문을 열었다.
“와아!”
가게마다 걸려있는 형형색색의 깃발과 북적이는 사람들의 웃는 얼굴까지.
금칠한 마차를 타고 지날 때마다 칙칙하고 먼지만 날리는 거리가 이렇게 변했으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그래, 이게 이 거리의 본 모습이지.’
악마 같은 황녀가 아닌 제국의 백성으로 변장하여 놀러 다닐 때에 보았던 거리의 모습으로 돌아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활기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거리를 보니 나의 노력이, 나의 연기가 헛수고가 아니었다는 걸 느꼈다.
아벨과 함께 돌이키려고 했던 것이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니 절로 뿌듯했고, 이걸 잘 이끈 그가 대견했다.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는데, 같이 가줄래?”
그가 어디로 데려갈지도 모르는데 무조건 좋을 거라 생각하고 기대하게 됐다.
“네, 당연하죠.”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그와 단 둘이 보내는 시간을 즐기려 그의 손을 잡고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달려갔다.
“지금은 복잡해도 조금만 걸어가면 괜찮아질 거야.”
“네.”
수많은 사람들 사이를 이리저리 지나다니다가 누군가가 우리를 덥석 잡아 한산한 곳으로 내팽겨 치듯 밀고는 아벨에게 달려들었다.
“에디!”
“야, 칼! 들러붙지 마!”
찰랑거리는 은빛 머리카락과 불타는 듯한 붉은 눈동자를 가진 사내, 아벨의 친우이자 동료인 칼라일이었다.
“이런, 황후 폐하께서 계셨군요.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괜찮습니다. 여기서는 리즈라고 불러주세요.”
“그러죠, 리즈.”
그는 살짝 고개를 숙여 내게 인사를 하고는 다시 아벨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에디, 나도 동행해도 돼?”
“당연히 안 되지!”
그는 실망한 듯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나에게 다가와 생글생글 웃으며 부탁했다.
“리즈, 이 길 잃은 어린 양을 같이 데리고 가주세요.”
나는 슬쩍 아벨의 눈치를 살폈지만, 그는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아, 그럼 가시려는 데까지만 데려다드릴게요.”
그는 그것만으로도 고맙다는 듯이 활짝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감사합니다, 리즈.”
“뭘요.”
칼라일은 실실 웃으며 지금이라도 빨리 갈 길 가라는 듯이 따가운 눈빛을 한 채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아벨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에디, 저 빵집에 가서 팥빵 두 개만 사와.”
“아아, 그래. 조금만 기다려.”
멍한 표정을 하며 빵집 안으로 들어간 그의 대답은 세뇌를 당한 사람처럼 어딘가 이상했다.
잠깐, 세뇌를 당한 사람처럼?
어색한 말투와 왠지 이상한 행동. 텅 빈 눈과 멍한 표정까지. 세뇌를 당한 사람의 상태와 완전히 똑같아 소름이 끼쳤다.
설마, 칼라일이 마법을 건 거야? 그런 마법은 분명 금지되었을 텐데······?
“그럼, 방해꾼도 사라졌겠다, 둘이서 조금 대화를 해 볼까요?”
내 기억 속의 그는 경치 좋은 곳에 앉아 책을 읽거나 아벨과 함께 옥신각신하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 짓는 모습밖에 없었다.
그런 모습들과 맞지 않게 섬뜩한 칼라일의 말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보니,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테레스티아 황녀님?”
그가 덧붙인 말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