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불이야?!”
대원들의 시선은 모두 한쪽 벽면을 차지하고 있는 TV를 향해 있었다. 그 속에는 단정하게 머리를 말아 올린 여성 앵커가 말을 하고 있었다.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20시 30분경 대전에 위치한 페인트 공장에서 화재가 나 12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소방당국은..’
“저 시간에 우리도 한창 화재 진압하고 있지 않았나?”
“그러게 요새 대한민국 참 다사다난하네 무슨 하루에 이렇게 많은 사고가 터진담.”
한마디씩 던지고 있는 대원들 사이에 창현과 동식은 오른쪽 제일 구석에 있는 방으로 안내받았다.
“이곳은 본부에 오신 파수꾼분들만 가끔 쓰시는 곳입니다. 그러니 편히 사용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오늘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대원은 경례를 하고 돌아갔다. 방문을 열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일정 간격을 두고 위치한 두 개의 커다란 침대였다. 그리고 문 바로 옆엔 샤워 시설을 갖춘 화장실이 있었다. 마치 NSR이 아닌 고급호텔에 와있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동식은 곧장 침대로 달려가 다이빙을 했다. 푹신한 침대 위로 떨어진 동식은 팔다리를 파닥거리며 말했다.
“이정도 대우면 파수꾼도 할 만하다. 어쨌든 우리도 공무원인 거잖아. 맞지?”
창현 역시 침대에 걸터앉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을까? 대한민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거니까. 공무원이겠지?”
“그럼 연금도 주려나? 우리 꽤나 끗발 좋은 것 같던데. 연금도 꽤 주겠지?”
“연금은 무슨. 언제까지 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무슨 벌써부터 연금 타령이야. 당장 월급도 안 주는 마당에.”
동식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맞아. 군대 간 친구들 얘기 들어보니까 월급 준다던데. 우리도 2년이나 정부를 위해 고생했는데 월급은커녕 땡전 한 푼 안 준거잖아 지금?”
“대신 네 말대로 좋은 끗발이 생겼잖아. 그거에 감사해야지. 군대는 전역해도 그냥 전역증 하나 주고 땡이라고.”
창현의 말에 동식은 입을 삐쭉거리며 말했다.
“쳇. 그래도 너무하네 정말.”
창현은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우며 말했다.
“이제 자자. 오늘 신경을 너무 많이 썼더니 피곤하네.”
동식 역시 다시 누우며 말했다.
“그래. 아까 임명식 전에 씻었으니까. 그나저나 우리 한 시간마다 어떻게 일어나지? 여기 알람시계도 없는 것 같은데.”
두리번거리던 창현은 침대 사이에 위치한 작은 수납장에 올려진 전자시계를 발견하고 말했다.
“내가 알람 맞춰둘 테니까 걱정 말고 자.”
“그럼 부탁할게.”
알람을 맞추고 창현은 푹신한 침대에 다시 누웠다. 몇 분 지나지 않았는데 동식은 그새 잠들었는지 쌔근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창현은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조금 전 보았던 서혜진의 얼굴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었다. 2년 전 비둘기공원에서 본 뒤로 처음 본 것이었다. 창현이 그림자를 선택하지 않고 NSR로 들어왔기 때문인 걸까? 그래서 언제든 죽일 수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창현의 지근거리까지 왔던 것일까. 하지만 바로 그때 무언가가 창현의 머리를 채찍처럼 후려치며 스쳐 지나갔다.
‘다음 소식입니다. 오늘 20시 30분경 대전에 위치한 페인트 공장에서 화재가 나 12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당하는 사고가 벌어졌습니다. 소방당국은..’
창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동시간대 비슷한 사건으로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생각할수록 서혜진이 짜놓은 완벽한 판에 끌려들어간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산에 불을 낸 것부터 앰뷸런스를 타고 나타난 것까지. 그리고 마지막 창현을 향한 그 비웃음.
만약 페인트 공장 사건이 정말 그림자의 소행이었다면?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직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직 NSR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잘은 몰랐지만, 파수꾼은 분명 창현과 동식이 전부가 아니었다. 저렇게 큰 사고였다면, 다른 파수꾼들이 몰랐을 리 없었다.
다시 누워있자니 천장에 서혜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웃음. 그것은 대체 무엇을 의미한 것이었을까.
*****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어요. 조별 과제는 다음 주까지입니다. 잊지 말도록 하세요.”
강의실에는 학생들의 한숨과 야유가 가득 찼다. 칠판 앞의 남자는 괜스레 한 번 웃고는 밖으로 나가버렸다. 짐을 싸고 있는 학생들은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중에 귀에 익는 이름을 말하는 남자가 있었다.
“준식이 형. 그럼 우리 조별 과제는 어떻게 할 거예요? 형이 조장이잖아요.”
준식이는 세상의 짐을 모두 다 짊어진 표정으로 말했다.
“미리 말하는데 아프다느니 어쩌느니 하면 그 사람 이름은 그냥 바로 뺀다. 아무리 급한 일이 생겨도 과제야. 본인이 참여하지도 않아놓고 이름 같이 올려달라는 건 본인도 양심 없는 행위라는 거 잘 알거야. 자료에 관해선 나중에 각자 연락 줄 테니까 알아서들 잘 정리해서 보내.”
준식의 말에 여자 둘과 남자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강의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준식 역시 강의실을 빠져나와 학교 밖으로 터벅거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형. 저 형 도움이 좀 필요한데 시간 괜찮으세요?”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준식은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고 대답했다.
“그럼 저야 좋죠. 예예. 알겠습니다. 네.”
전화를 끊고는 준식은 방향을 바꿔 스탠드로 향했다. 하늘은 이미 노을이 깔려 멋들어진 오렌지 빛깔을 내고 있었다. 널찍한 운동장에선 공을 튕기며 농구를 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준식은 스탠드에 앉아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각기 짝을 이뤄 학교를 거닐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준식은 문득 창현이 떠올랐다. 요즘은 이렇게 가끔 창현이 떠올랐다.
처음 창현이 사라져버렸을 당시에는 마지막 이상했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아른거리며 스스로 무언가를 놓쳐버린 것만 같았다. 하지만 바쁜 학교생활과 시간이 지날수록 그 생각은 별일 아닐 것이라는 혼자만의 결론을 내렸고, 연락이 없는 것 또한 ‘바빠서’라는 결론을 내린 뒤였다. 그러자 창현에 대한 생각은 점차 지워져갔고, 이렇게 아주 가끔 떠오를 뿐이었다.
자신을 지겹도록 쫓아다니던 김형식 형사와는 어느덧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부모님보다도 자주 통화하고 창현이 사라져 버린 이유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다 보니 어느새 김형식 형사를 형이라 부르고 있었다. 김형식 형사은 이제 창현의 뒤를 쫓는 일은 그만두었다. 1년이란 시간을 뒤쫓더니 어느 순간 모든 것을 포기해 버렸다. 그리고 또다시 1년 동안 떠밀린 수많은 자질구레한 사건 속에서 자신이 창현을 쫓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것 같았다.
벌써 2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더 이상 워킹 비자만으로 호주에 있지 못할 것이니 조만간 귀국할 것이다. 그럼 창현과 함께 형식이 엄한 사람을 들쑤시고 다녔다는 것을 마음껏 놀려 줄 참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뒤에서 시끄러운 차 소리가 들렸다.
눈앞에는 새차를 얼마나 안 한 건지 새하얗다 못해 회색빛의 SUV가 서 있었다. 그리고 운전석에는 준식을 보며 사람 좋은 미소를 하고 있는 김형식이 있었다.
“뭘 보고 섰어? 얼른 타. 도움 필요하다면서?”
준식은 곧장 조수석 문을 열었다. 2년 전 어느 날처럼 쾌쾌한 냄새와 담배 쩐내가 반겼다. 하지만 전과 다른 점이라면 이젠 망설이지 않고 차에 올라탄다는 것이었다.
“그래 뭔 사고를 치셨기에 우리 명문대생이 이 형사님을 보자고 하셨을까?”
“사고는 무슨 사고에요. 저 법 없이도 사는 거 형도 아시잖아요. 교수님이 범죄자와 일반인의 심리적 차이가 불러오는...”
“거기까지. 그러니까 내가 뭘 해주면 되는 거야?”
“음.. 그냥 제가 형이 하는 일을 좀 구경하면 도움이 많이 될 것 같은데요.”
“그럼 진즉에 그렇게 말을 했어야지. 근데 밥은 먹었냐?”
“아직이요.”
“좋아. 그럼 내가 또 진귀한 경험 하나 시켜줘야겠네. 이게 또 경찰서에서 먹는 짜장면 맛이 그렇게 기가 막히거든.”
형식의 낡은 자동차는 툴툴거리며 학교를 벗어나 경찰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