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너는 동생인 애쉬를 잘 챙겨야지, 대체 뭐 하는 짓이니? 애쉬, 다친 데 없어?”
수잔나는 애쉴리를 잡아 일으키며 다니엘이라는 남자아이를 나무랐다. 캐런은 다니엘이 윌리엄의 어린 시절을 쏙 빼닮아서 깜짝 놀랐다. 다니엘과 애쉴리는 어릴 적의 윌리엄과 캐런 남매와 똑같았다! 그리고 둘을 혼내는 수잔나는 돌아가신 어머니 실비아와 비슷했다.
“다친 덴 없어요. 죄송해요, 외숙모. 제가 엄마가 걱정돼서 엿듣자고 했어요. 댄 오빠를 혼내지 마세요.”
애쉴리는 어른스럽게 빌었다. 수잔나는 한숨을 쉬면서 애쉴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애쉬 마음은 알지만, 이런 나쁜 짓을 하면 안 돼. 애쉬는 착한 아이잖니.”
“애쉬는 착한 아이 아니에요. 엿듣는 나쁜 짓을 했으니깐 나쁜 아이에요.”
애쉴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수잔나는 혀로 새처럼 위협하는 소리를 내고 검지를 좌우로 휘저었다. 그 모습은 진짜 엄마였다. 캐런은 지나간 6년의 세월을 실감했다.
“아니야, 애쉬는 착한 아이야. 단지 엄마를 걱정한 거지. 잘못한 건 댄이야, 동생을 지켰어야지. 그렇게 넘어져서 다치면 어쩔 뻔했니?”
“난 잘못하지 않았어, 엄마. 나도 캐런 고모가 걱정됐단 말이야.”
다니엘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윌리엄의 연갈색 머리카락에 수잔나의 연하늘색 눈동자, 두상 골격이 좋아서 크면 꽤나 미남이 될 듯싶었다, 윌리엄처럼. 손가락도 길어서 키가 훌쩍 클 듯했다.
그 찰나 다니엘과 캐런의 시선이 마주쳤다. 캐런은 오싹했다. 과거의 윌리엄과 재회한 듯했다. 침전물이 가라앉은 듯 단정한 눈빛도 비슷했다. 다니엘은 장난기 넘치는 태도로 애쉴리를 쿡 찔렀다.
“애쉬, 오늘 고모는 네 말만큼 상태가 나쁘지 않은데? 평소보다 나은 것 같아. 그렇죠, 고모?”
캐런은 고모라는 말에 당혹했다. 애쉴리는 작은 두 주먹을 꼭 쥐며 반박했다.
“아니야, 댄 오빠! 아침에 막 일어났을 땐 엄마 심각했어! 어젯밤에…….”
애쉴리는 말을 뚝 멈췄다. 누가 입을 막기라도 한 것처럼. 수잔나가 물었다.
“어젯밤에 엄마가 많이 아팠어, 애쉬?”
“아, 네…… 많이 아팠어요, 엄마…… 오늘 아침에 또 날 모르는 사람처럼 쳐다봤어…….”
애쉴리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다니엘은 애쉴리의 손을 잡고 달랬다.
“애쉬, 고모가 널 못 알아볼 리가 없지. 너는 고모랑 이렇게 똑같이 닮아서 예쁜걸. 고모가 잠깐 아파서 그런 걸 너도 알면서. 이제는 널 똑바로 알아보시잖아.”
애쉴리는 애처롭게 딸꾹질하면서 얼굴에 눈물을 범벅하고 캐런을 쳐다봤다. 수잔나와 다니엘도 캐런에게 시선을 향했다.
‘수잔나는 내가 이 아이를 받아주기를 바라는구나. 내 기억이 엉망진창인 걸 알면서도.’
캐런은 씁쓸했으나 자신이 제정신이고 이성적이라는 증거를 보여야 할 때라는 느낌이 들었다. 설령 딸이 아니더라도 울고 있는 작은 아이를 안아주는 정도야 보편적인 선심이었다.
캐런은 과감히 애쉴리에게 다가가 두 팔을 벌려 안아주었다. 애쉴리는 캐런의 품에 파고들어 엉엉 울었다. 애쉴리의 눈물이 캐런의 헐렁한 실내복 드레스를 적셨다. 캐런은 눈시울이 찡해졌다. 이 작은 아이가 내 딸이야, 정말……?
“애쉬는 정말 울보구나. 작은 마법사 아가씨가 눈물에 떠내려가겠어.”
수잔나는 옷소매로 눈물을 문질러 닦았다.
“엄마도 울보면서 뭐야.”
다니엘은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수잔나의 치맛자락에 착 감겼다. 그 모습에서 어머니 실비아와 오빠 윌리엄을 본 캐런은 기어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든 상황이 낯선데도, 현실은 과거의 다정한 세상을 모방하고 있었다.
“캐런 고모도 운다!”
다니엘이 놀란 듯 소리 높여 외쳤다. 캐런은 다니엘이 놀라는 게 더 놀라웠다. 그 듣기만 해도 끔찍한 일들을 겪으면서 눈물이 다 말라버렸던 걸까?
캐런은 잃어버린 세월들을 찾고 싶었다. 자신이 분실한 기억, 마력, 반지, 무엇이든 전부. 수잔나의 설명으로는 부족했다. 스스로 알아내고 또 되찾고 싶었다. 수잔나가 아예 손수건을 꺼내어 흐느끼면서 다니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캐런 고모가 아픈 게 많이 나아서 이제 눈물도 나오게 됐나봐. 정말 잘됐다, 댄.”
다니엘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페이스가 점심 식사를 알리러 올 때까지 넷은 장마철처럼 축축하게 울었다.
식당에서 애쉴리는 포크를 왼손으로 쥐고 식사하면서 오른손은 캐런의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자수정 반지를 낀 앙증맞은 손은 엄마를 또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듯, 꼬마 자물쇠처럼 꼭 조여들었다.
하나뿐인 엄마 실비아를 사랑하던 어린 날의 캐런처럼.
***
“캐런, 오늘 우리 집에 가기 싫으면 애쉬라도 일단 데려가 놓을까요? 예전부터 그러려고 하긴 했는데, 애쉬가 절대 캐런에게서 안 떨어지려고 해서……. 그럼 캐런도 콜드웰 씨한테 피핑턴 하우스에 머문다고 말하기 쉬울 것 같고.”
아이들이 디저트까지 해치우고 나자 수잔나는 캐런에게 소근거렸다. 가정 불화 때문에 애쉴리에게 악영향이 갈까봐 걱정하는 듯했다. 애쉴리는 아직도 캐런의 왼손을 놓지 않았다. 작은 손의 감촉은 깃털처럼 간질간질했다. 캐런도 귓속말로 대답하려다가, 마음을 바꿔 다니엘에게 말했다.
“다니엘.”
“네, 캐런 고모.”
“애쉴리랑 나가서 놀아.”
“싫어! 나 엄마랑 있을 거야!”
애쉴리는 캐런의 손을 부여잡고 떼를 썼으나, 캐런은 애쉴리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명령했다. 엄마 실비아의 권위 있는 모습을 회상하면서, 똑같이.
“애쉬, 나는 수잔나랑 할 이야기가 있어. 그러니까 나가서 정원에서 놀아. 내가 아프면 수잔나가 지켜 줄 거야. 그러니까 아무 걱정 말고 댄이랑 있어.”
차마 엄마 실비아가 하던 대로 이마에 키스해줄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는 아직 거부감이 심했다. 하지만 애칭을 부른 것만으로도 애쉴리는 날선 경계심을 누그러뜨렸다. 다니엘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애쉴리의 손을 잡아채 데리고 나갔다. 애쉴리의 작고 끈적끈적하고 체온이 높은 손이 사라지자 손바닥이 상쾌했다. 수잔나가 환히 미소 지었다.
“캐런, 오늘 정말 다 나은 사람처럼 보여요.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그냥 이 김에 애쉴리랑 다 같이 피핑턴 하우스에 가요. 이혼 절차야 거기에서 밟아도 되잖아요.”
수잔나의 권유에 캐런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굳이 그럴 것 없어요. 애쉴리도 그냥 여기 두세요. 페이스도 애쉴리를 잘 다루던데, 일단 며칠만 제가 상황을 볼게요. 합의 이혼은 서명 뒤엔 법원 출석만 하면 되는 거잖아요. 만약 급해지면 애쉴리의 손을 잡고 피핑턴 하우스로 질주하죠, 뭐.”
캐런은 자신이 한 말에 흠칫 놀랐다. 예전에도 애쉴리의 손을 잡고 거리를 허둥지둥 뛰었던 것 같은 어렴풋한 이미지가 스쳐갔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쫓겼나……? 그 때 자신의 손에는 마법사의 반지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기억인지 상상인지 모를 장면은 연기처럼 흩어졌다.
“……알았어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날 불러요, 얼른 마차에 뛰어올라 질주해 올게요!”
수잔나가 주먹을 꼭 쥐면서 다짐했다. 캐런은 웃었다.
“연약한 수잔나가 마차에 뛰어오른다고요? 꽤 믿음직하네요.”
“지금 나 놀리는 거예요?”
“어떻게 알았어요?”
“캐런!”
캐런은 미소 지으며 창 밖을 내다보았다. 장미나무가 우거진 잔디밭에서 두 아이가 뛰노는 모습이 보였다. 두 아이들은 항상 저렇게 놀았을 터이다. 캐런은 조용히 말했다.
“정말 이상해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난 너무나 절망적이었어요. 결혼식 전날 밤에 잠들어, 6년 후 이혼 직전에 깨어났다 느꼈으니까요.
그런데 수잔나랑 다니엘이 와서 이야기하고 같이 울고 식사를 나누니까, 새 사람으로 부활한 것 같아요. 아무리 절망적이라도 사람은 살게 되어 있나 봐요. 내 손에 마법사의 반지가 없는데도 내가 멀쩡히 웃고 있다니…….”
“캐런, 마법사가 아니어도 괜찮아요. 캐런은 똑똑하고 용감하잖아요. 아직 젊고요! 뭐든 할 수 있으니 걱정 마요. 윌리엄이 지금 캐런이 이렇게 나아진 모습을 보면 얼마나 기뻐할지 몰라요!”
수잔나는 격려했다. 캐런은 그 틈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다니엘은 마력자가 아니군요?”
다니엘은 영리해 보였지만 손에는 꼬마 마력자들이 끼는 자수정 반지가 없었다.
“네, 윌리엄이랑 날 닮았나 봐요. 돌아가신 어머님을 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요. 격세 유전 마력자도 흔하잖아요. 하지만 아니었어요.
자각시기인 다섯 살도 지났고, 앞으로도 자각하지 않을 것 같아요. 윌리엄이랑 외모도 비슷하지만 성격이나 기질도 닮았어요. 아마 윌리엄이 밟은 코스대로 가서 관료가 되지 않을까요?”
수잔나는 수줍은 듯 배시시 웃었다. 수잔나는 언제나 윌리엄을 너무 좋아했으니까.
“애쉴리는 언제 마력을 자각했어요?”
캐런의 다음 질문에 수잔나는 자랑스러워하며 대답했다.
“그게, 우량아로 태어나서 그런지 정말 빨랐어요. 세 살, 그러니까 37개월 무렵이었으니까요. 이건 신기록이래요. 애쉬가 얼마나 영특한지, 마법학교에 가면 분명 1등만 할 거라고 애거서 씨가 그랬어요. 타고난 마력이 또래들이랑은 비교도 안 된다고요. 분명 캐런을 닮아서 유달리 뛰어난 거예요.”
“……그래요?”
캐런은 어색하게 장단을 맞췄다. 뱃속이 근질근질 이상스러운 기분이었다. 해맑게 뛰어노는 앵두 무늬 원피스 꼬마가 자신을 닮아서 또래보다 앞서 간다니! 보통은 네 살에서 다섯 살, 늦되는 아이는 일곱 살에도 하는 자각을 남들보다 신속히 해치우면 훌륭한 마법사가 될 확률이 높다.
“네! 임신 중에 아가씨의 마력을 많이 흡수해버린 게 아닐까 라는 이야기도 있었지만요…….”
수잔나는 눈물을 글썽였다. 캐런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내가 속 빠진 고둥 껍데기가 되었군요.”
“캐런, 제발 슬퍼하지 마요…….”
“아니에요, 아이가 내 마력을 빼앗아 태어나겠다고 결심한 것도 아닌데요. 임신은 내 선택이었겠죠. 출산은 하늘과 의사와 엘린 님께 맡기는 것이니, 누굴 원망하겠어요?”
엄마 실비아가 윌리엄과 캐런을 낳으며 건강을 상했듯, 자신도 아이를 낳으며 몸을 망치고, 그 결과 일어난 연쇄효과로 점점 불행해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만 했다. 더 이상 신경 쇠약이니 뭐니 하면서 응석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기억은 사라졌지만 이성은 돌아왔으니, 이제부터 스스로를 추슬러야 했다.
그래야 애쉴리를 돌봐 주거나, 아니면…… 아이를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머리가 약하게 지끈거렸다. 캐런은 이마를 짚었다.
“윌리엄 오빠에게 안부 전해 줘요. 한 번쯤 나 보러 와도 위협하지 않는다고 말해 주고요. 이제 난 마법을 쓸 수 없으니까.”
캐런의 블랙 유머에 수잔나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윌리엄이 캐런과 또렷한 정신으로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면 좋아서 숨어서 울 걸요. 분명해요. 캐런은 아직도 그이가 냉정한 척하는 껍질 속에선 정이 많다는 걸 모른다니까요. 봐요, 다니엘이 저렇게 애쉴리를 좋아하는데, 윌리엄이 캐런을 안 좋아할 리 있어요?”
창밖의 다니엘은 손으로 코를 올려 돼지코를 만들어 애쉴리를 웃기고 있었다. 캐런은 웃었다.
“그럼 와서 옛날처럼 벌칙으로 돼지코나 한 번 해달라고 전해 주든가요. 엉덩이로 이름쓰기면 더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