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알만한 대형 쇼핑몰이 있는 곳.
높다란 쇼핑센터들을 하나 하나 천천히 둘러보던 해인은 가장 높아 보이는 빌딩을 가리키며 "저기서 내려주세요."라는 말과 함께 동호를 향해 웃음을 보였다.
아까부터 계속 그녀의 ‘나 죽으면’을 생각하며 마음 아파하던 동호는 그녀의 웃는 얼굴에 고개를 살짝 가로젓더니 들고온 손가방에서 두툼한 봉투하나 꺼내 미터기 요금을 지불하고 아직은 약한 그녀를 부축해 원하는 곳으로 향했다.
"뭔 돈이야?"
봉투 속 꽤 많았던 돈의 출처가 궁금해 질문하는 그녀가 고마운 동호는 "통통이 아가들 판 돈."이라 하더니 자기 때문에 그동안 공들인 송아지들을 판 거 아닌가 싶어 미안한 얼굴로 바라보는 그녀에게 "니가 원하믄 저기 그러니께, 니를, 니를 위혀서 쓸 돈이여. 그니께 신경쓰지 마러."라며 괜스레 민망한 듯 헛기침 한 번 하고는 가느다란 그녀의 어깨를 감싸 부축했다.
쇼핑몰 안은 생각보다 화려하며, 재래시장과 다른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항상 북적거리며, 정스러운 곳에서 어묵 꼬치 하나씩 물고 장보던 그 느낌과 사뭇달라 동호와 그녀는 어리둥절하게 1층부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마침 눈에 들어온 커다란 미용실에 동호는 "머리부터 혀자. 내 해인이 화장도 좀 혀고."라며 감싸 안은 어깨를 이끌고 그곳으로 향했다.
의자에 앉은 그녀에게 친절히 다가온 미용사를 보면서 동호는 "이쁘게. 그 여자 가수들. 뭐뎌? 그, 그 아 맞다. 아이돌 머리처럼 해주셔요." 자신의 소중한 해인이가 변신할 모습에 기대 가득찬 설레는 얼굴로 부탁했다.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머리를 매만지고, 머리에 알맞게 맞추어 화장도 해주며 최고의 서비스를 제공한 미용사는 모든 것이 끝난 그녀를 가리키며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깊었던 다크서클이 사라지면서 피부는 자연스래 꽃피었고, 생기 없던 머리카락에 광택이 생기자 연기자를 꿈꿨던 1년 전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동호는 아낌없이 봉투를 열면서도 밝아진 해인이에게 눈길을 떼지 못했다.
"이쁘다 이뻐. 내 해인인디. 암만."
그녀도 자신의 변신에 꽤 기분이 상쾌해졌다.
동호의 손을 잡고 언제 기운 없었나 싶게 발랄한 걸음으로 옷을 고르러 다녔다.
어느새 쇼핑몰 내에 팔고 있는 소프트아이스크림의 환상적인 맛을 감탄하며 자신의 곁에서 웃어주는 동호에게 덩달아 기쁘게 웃었다.
네이비색 쉬폰 원피스의 하늘거림이 마음에 든 그녀는 그것에 어울리는 검은 색 두툼한 코트의 도도함을 두른 채 "신발도 사 줘."라며 더욱 밝아져 동호를 졸랐고, 동호 역시 더욱 환해진 그녀의 얼굴에 안심하며 "배고프지 않어? 내는 배고픈디?"하더니 은근 그녀에게 먹을 것을 권했다.
그녀는 다행스럽게도 고개를 끄덕거리며 "응. 배고파. 밥 먹고 싶어"라 답하며 맞잡은 손을 흔들었다.
"그려, 그려 밥 먹으러 가자. 내 해인아."
눈에서 꿀 떨어지게 바라보던 동호는 그녀의 손을 더욱 힘있게 잡고 식당가로 향했다.
마음이 편해졌는지 토악질 없이 편하게 죽을 먹는 그녀의 밝은 모습에 마냥 행복해진 동호는 그녀의 죽그릇에 조그맣게 자른 김치를 얹어 주면서 뭐가 그리 기특한지 마냥 그녀를 바라보았다.
해인 역시 오랜만에 든든해진 배 속에 더욱 행복함을 느끼며 식당 거울에 비친 빛나는 아가씨를 힐끗 바라보았다.
너무 예쁘게 웃고 있는 모습은 참 인상적이어서 해인은 스스로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니 여. 내 해인이. 참 예쁘지? 내 해인이는 항상 저랬어. 보기 좋지?"
"응."
동호의 반짝이는 눈에 살짝 슬픈 눈길을 보냈다가 그녀는 다시 웃으며 대답했다.
"다 먹었음 신발 사러 가자. 지금 운동화는 영 아녀."
해인의 먼지 앉은 흰 운동화가 마음에 걸렸었는지, 동호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동호에게 기대 그동안의 아픔을 잊은 듯 신발 가게로 향하는 그녀의 발걸음은 훨씬 발랄해졌다.
그 와중에 하필 스쳐 지나가는 텔레비전에서 그 사내의 얼굴이 왜 나오는 것인지.
구치소에서 나오며 했던 그 인터뷰.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굳어버렸고, 동호는 의아해 시선을 돌리다가 경악하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볼 수 없도록.
"그동안 많이 힘드셨죠?"
‘거짓말투성이 저주받을 개자식.‘
"네, 하지만 저에게 있을지 모를 죄를 반성하고 있었습니다."
‘가식적이며 착한척 하는 악마.’
"그녀에게 사과는 받으셨나요?"
그녀는 그 소리에 동호의 품에서 귀를 막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내가 왜? 내가 뭘 잘못했는데? 개새끼! 나쁜 새끼! 악마 새끼! 왜? 내가 왜!"
동호는 떨기 시작한 해인을 더욱 힘주어 품에 안고는 조금씩 조금씩 그녀가 놀라지 않도록 발걸음을 옮겼다.
"해인아 괜찮혀. 괜찮혀.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있잖여. 내가 있으니께 걱정 마러. 저리 가자. 저기로 가자."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 그 시선은 곧 비수가 되어 매섭게 그녀의 심장으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비난이 아니라 의아함이란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즐거웠던 기분을 순식간에 날려버리고 그녀는 그 시선들을 비수로 만들어 심장을 스스로 찔러대기 시작했다.
여린 가슴 속, 피가 나기 시작한 심장의 고통을 느끼며, 그녀는 다시 어둠 속에 갇혔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자신의 주홍글씨를, 그리고 하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쓰고 스스로 죽이던 그 모습 그대로.
힐끗 바라본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서서히 사라지고 있다는 걸 깨달은 동호는 그녀를 번쩍 안았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엘리베이터를 향해 정신 없이 돌진했다.
옥상정원이라는 버튼을 누른 후에야 겨우 안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동호의 품에 파묻혀 둥지에서 떨어진 아기 새처럼 덜덜 떨고 있었다.
"괜찮혀. 괜찮혀."
동호의 말에도 쉽게 진정되지 않는 그녀였다.
사랑을 받고 싶었고 관심이 필요했었다.
그저 그런 것뿐.
그걸 위해서 잠시 허영 섞인 반항을 한 것이 이렇듯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악인은 벌을 받는 것이라 전래동화에서도 가르쳐주었고, 학교에서도 항상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왜?
자신이 하지도 않은 잘못을 뒤집어쓰고 이토록 고통받아야 하는지.
동호도 그녀도 모를 일이었다.
도착한 옥상 정원에서 시원한 바람을 받으며 시선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으니 잠시 사라졌던 그녀의 초점은 다시 반짝이며 돌아오고 있었다.
"동호야. 나 물 마시고 싶어."
겨우 차린 정신에 그녀는 목이 마른지, 동호를 보면서 애절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새 어둑어둑해진 해 짧은 겨울.
목마르다며 이야기하는 그녀의 애절한 눈빛을 외면 못 한 동호는 "꼭 여기 있어야 뎌. 어디 가믄 안 뎌."라며 몇 번이나 다짐을 받고선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려갔다.
그런 동호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몸을 일으키더니 수많은 불빛이 반짝이는 고층 건물 숲 사이 가장 높은 곳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자신을 떠나 물을 찾으러 간 동호마저도 알지 못한 어둡고 가장 위태로운 자리를 알맞게 찾아서 남들이 보면 비명을 지르기 딱 좋은 위치에 올라선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저 빌딩 아래 즐거워하며 걱정 없이 움직이는 조그마한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바람의 장난에 흩날리는 긴 머리의 거추장스러움도 별거 아니라는 듯 무심히 흔들거리고 있었다.
그저 받고 싶었던 사랑과 관심의 죄가 너무 무거운 그녀의 어깨는 우울함의 무게까지 겹쳐져 한껏 쳐져 있었고, 아직은 세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지 그 자리에 멈춰 그간의 망설임이 결정으로 바뀌며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자신을 위해 정성 어리게 키웠던 송아지마저 처분한 동호에게 미안함이 가득해 두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듯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줄 알았다면 더욱더 많이 사랑해 줄걸.
더 많이 안아 줄걸.
좀 더 빨리 용기 내 방 안에서 나와 그저 그 아이만 바라볼걸.
그런 그녀의 두 뺨을 어루만지는 고층의 바람은 충분히 냉정했다.
고층 빌딩을 스멀스멀 휘감아 올라온 바람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두 뺨을 차갑게 어루만졌다.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삶과 죽음의 선택을 고심하는 그녀의 머릿속에 스치듯 지나갔다.
특히나 곁에서 자신보다 그녀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기억날 때면 그녀의 발은 죽음에서 벗어나려고 조금씩 뒤로 물러섰다가도 잊히지 않는 저주받을 개자식의 비열한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죽은은 그녀의 여린 발을 붙잡아 위태롭게 다시 세우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의 망설임 끝에 그녀는 결국 자신의 처참한 삶에 대한 복수로 죽기를 결심한다.
“나쁜 새끼. 개새끼. 죽어서 꼭 복수하리라…,”
저주와 함께 그녀의 어깨는 점점 앞으로 나아갔고 외벽을 타고 올라오는 바람에 균형 잃은 그녀의 발은 몸을 더 이상 지탱하기에 역부족이었다.
마음속으로 세상을 향한 마지막 인사와 쓰레기 같은 놈을 위한 저주를 남기며 그녀는 곧장 사신의 손이 된 중력에게 벗어나지 못할 멱살을 잡힌 채 아래로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동호의 "해인아! 안 돼!"라는 가슴 찢어지는 비명과 급한 발소리를 들으면서 중력에 이끌려 바닥으로 내리꽂히면서도 아직 죽음을 경험해보지 않은 그녀로선 이것을 단지 번지점프의 짜릿함과 전율처럼 느끼며 여태까지 왜 망설였나 싶을 정도로 별거 아나었음에 한숨 쉬고는 그간 망설이기만 했던 자신의 나약함을 너무도 한스러워했다.
생각보다 지면은 쉽게 도달하지 않았다.
그녀의 이 희열은 신이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 사신의 사악하고 즐거운 얼굴에 도착할 때까지 편안함을 느끼며 진정한 죽음의 고통이 어떤 것인지 미처 깨닫지 못했다.
조그만 사람들의 흘러가는 모습이 슬로비디오인 양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놀랍게도 그녀의 머릿속은 죽음을 경험한 여러 사람들의 믿지 못할 증언과 마찬가지로 살아온 날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썩을 놈의 추악함까지 파노라마 영상으로 펼쳐지기 시작했다.
살아온 인생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하자, 시간은 더욱 느리게 움직였다.
그녀는 중력 속에 파묻혀 흐르는 눈물을 바람에게 선물로 주면서 생을 마감 중인 그녀의 모든 기관이 주는 마지막 영화에 흠뻑 취해 있었다.
끝으로 ‘이번 생은 이렇게 막을 내립니다.’라는 나레이션이 머릿속에서 상상될 때까지…,
그러나 그저 평온할 것만 같았던 죽음의 시간은 갑자기 흐름이 바뀌어 점점 빠르게 변하여 공기들이 그녀의 두 뺨을 때렸고 작게만 보이던 길가 사람들이 그녀의 낙하 장면을 알아채고 비명을 지를 만큼 가까워졌다.
걸어가던 사람들은 눈을 가리며 비명을 질렀고, 주행 중이던 자동차들이 급브레이크를 밟았으며, 차 안의 운전자들은 그저 창문을 내리고 그녀의 낙하 장면을 입만 벌린 채, 바라볼 뿐있었다.
멈춰 선 택시 안에서 기사가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며 “어, 저거! 저거 사람 떨어지네!”라 말하자 뒷좌석의 나이 지긋한 수녀님은 시선을 창밖으로 고정한 후 성호룰 그으며 아스팔트로 빠르게 내리꽂히는 그녀가 살 수 있기를 기도하였다.
그 옆, 이미 붉어질 대로 붉어진 슬픈 한쪽 눈의 젊은 여인이 창밖의 상황은 아랑곳없이 “아저씨, 저희 급해요. 빨리 몰아 주세요.”라고 재촉하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들은 뇌출혈로 쓰러진 이쁜이 이모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하던 애연이와 수녀님으로 애연의 마음속엔 온통 이쁜이 이모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허공에서 그녀의 몸뚱어리는 무섭도록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을 달렸다.
이젠 무섭도록 빠르게 다가오는 시커먼 아스팔트 지면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며 자신을 피하는 사람들 사이로 중력의 무자비한 위력을 받으면서 그대로 고층 빌딩의 높이 만큼 충격으로 아스팔트를 파고들어 갈 듯 곤두박질쳤다.
죽음은 드디어 사악하고 차가운 웃음을 지으며 그녀에게 이전에는 결코 상상치도 못할 무지막지한 고통을 주었다.
온몸 구석구석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수십 개의 바늘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시작으로 바늘이 정으로 변해 뼈 마디마디에 박히더니, 몸에 박힌 정 하나하나를 해머로 내려치기 시작했다.
죽음은 무덤 속에서도 잊지 못할 고통을 느끼게 하면서 그녀의 모든 것을 부숴버렸다.
‘살려줘 동호야. 동호를 한 번 더 볼걸. 이렇게 아플 줄 알았으면 뛰어내리지 말걸. 동호야. 살려줘…, 내가 잘못했어.’
그녀의 후회에도 사신은 웃는 얼굴을 쉽게 치우지 않았다.
이미 시작된 고통은 멈출 줄 모르고 반복적으로 온몸 구석구석 머리부터 발끝까지 뼈 마디마디에 박힌 정을 하나하나 해머로 내리치면서 살아있는 그녀의 모든 것을 쉬지 않고 부숴버렸다.
온몸이 부서지는 고통 속 마지막까지 살아있었던 청각은 사람들이 미친 듯 지르는 비명과 어느새 달려온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 이것을 끝으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는 그날 그곳에서 그렇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