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호는 흐린 아침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 따라 유난히 흐린 하늘이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지금 태호에게 날씨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 일이 끝나면 바로 성민이를 만나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까지는 정말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아니 틈도 주지 않았던 일들이, 준비 된 것처럼 하나둘 시작되는 것 같았다. 뭔지 모를 용기가 생겼다. 태호 자신도 모르게 커져가는 헛된 희망은 가능한 한 무시했다. 무언가가 달라질 거라는 기대보다는 다시 크게 용기를 내어보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시간이 만들어준 깨달음이었다. 태호 자신도 신기했다.
“형, 오랜만이예요.”
태호는 성민이의 집으로 들어섰다. 성민이는 들어오는 태호를 향해 장난기 가득한 매서운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었다.
“야, 나 서운해 해도 되는 거 맞지?”
성민이는 태호를 다시 이렇게 봐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태호가 힘들어 할 때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너무도 미안했다.
“형, 미안해요.”
시간을 지나오면서 태호는 알게 되었다. 자신의 실패와 같았던 경험 때문에 주위에 손을 내밀어 주던 사람들을 차단했었다. 그게 너무 미안했고,그런 자신을 기다려 준 그들이 너무 고마워서 태호는 어떻게든 그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태호의 눈빛에, 태호의 표정에 성민이는 알 수 있었다. 태호가 이제 더 많이 단단해졌다는 것을.
성민이는 태호를 위해 커피를 내렸다. 태호와 마주보고 앉은 성민이는 뭔가 모르게 달라진 태호가 고마웠다.
“많이 힘들었지? 지금은... 괜찮아 보인다.”
성민이의 말에 태호는 살짝 웃어보였다.
“형, 운동만 힘든 줄 알았는데, 와...정말 힘들더라구요.”
태호는 한 번도 운동을 힘들어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은 성민이도 알았다. 운동을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마 태호를 제일 힘들게 하지 않았을까. 그냥 태호의 방황을 지켜보면서 든 생각이었다. 확신 할 수 없었지만, 그냥 그럴 거라고 짐작되었다. 그리고 가끔 주위에서 은퇴한 지인들을 보면 남일 같지 않았다. 그래서 태호는 더 힘들었지 않았을까 싶었다.
“태호야, 다시 시작하자.”
태호는 그 말에 가슴이 떨렸다. 다시는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그런 모습으로는 더욱 싫다고 수 도 없이 다짐했었는데... 그랬던 그때의 자신이 떠올라 웃었고, 그때의 절망이 다시 기억나 눈을 감았다.
‘도와주세요, 형...’
“형, 제가 아직 나이도 어중간하고, 경험도 부족한데 괜찮을까요?
성민이는 태호의 말에 희망을 보았다.
“태호야, 네가 어떻게 운동했는지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비록 선수가 아니더라도...”
성민이는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울컥했다. 그렇게도 바랐던 간절한 꿈을 태호가 이제는 옆에서 지켜봐야한다는 사실이 실감되었다. 그 섭섭함과 상실감을 매 순간 준비한다고 해도 막상 이렇게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형, 괜찮아요.”
태호는 성민의 표정 변화에 그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태호는 진짜 이제 괜찮다는 생각이 그 순간 들었다. 대신에, 세상 어딘가에 자신의 또 다른 삶이 있어 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고 싶었다. 무작정 기대하기 보다는 그냥 인생에 꿈이라는 것을 다시 가져보고 싶었다. 거창한 것을 바라진 않았다. 그냥 남들처럼만 바라고 싶었다. 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세상 모든 것에 부탁하고 싶었다. 결과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그 바람 덕분에 다시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생각이 또 다시, 그때처럼 태호를 잡아주기 시작했다.
“태호야,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도와볼게.”
태호는 성민이가 너무도 고마웠다. 목 끝까지 차오른 울음에 목이 아려왔다.
태호는 성민이를 만나고 와서 마음이 살짝 설레었다. 다시 운동을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이 태호에게 너무도 큰 행복이 되었다. 열심히 한다면 자신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올 것이고, 그럼 또 다른 꿈을 가져 볼 수도 있을 것이었다.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많은 꿈들을... 운동을 그만두게 되면서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생각이 태호의 마음 가득 채워지자 태호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이게 뭐야.”
태호는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뒤돌아보았다. 태호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 흘린 음료수가 다른 손님의 가방과 옷에 묻어 있었다.
태호는 편의점에서 사용하는 물티슈를 들고 손님에게 다가갔다.
“이거라도 우선 사용하시겠습니까?”
태호의 말에 손님은 화가 난 표정을 지으며 물티슈를 쳐서 떨어뜨렸다.
“이런 걸로 될 줄 알아? 이 가게 뭐야?”
태호는 어떻게 할 줄 몰라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어떻게 해드릴까요?”
손님은 태호의 사과에 태호를 더 노려보았다.
“이게 얼마인줄 알고. 덩치만 크지 일을 뭐 이따위로 해.”
손님의 말에 태호도 손님의 얼굴을 보았다. 눈의 초점은 없었고, 그냥 모든 것에 짜증과 화를 내고 있는 취객이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화가 나지는 않았다. 우선 자신이 좀 더 주위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술에 취해 이성이 없는 사람과는 상대하지 않는 게 좋다고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손님은 태호의 얼굴에서 자신의 행동이 큰 영향을 준 것 같지 않다고 느꼈다. 갑자기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당해봐라...’
손님은 갑자기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삿대질도 시작되었다. 태호는 덤덤하게 죄송하다고 다시 말했다. 다른 손님들이 들어오려다가 편의점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에 다시 발길을 돌려 나갔다.
편의점 안에 취객은 점차 오른 화에 펄쩍 뛰고 소리를 질렀다. 몇 분이 지났을까.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차가 편의점 앞에 섰고, 경찰이 들어오자 취객은 더 강하게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간단하게 자초지종을 듣고, 손님에게 물었다.
“직원이 어떻게 하면 되나요?”
경찰의 질문에 손님은 대답을 못했다.
“세탁비를 주면 되나요?”
경찰의 또 다른 질문에 손님은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이 옷하고 가방 비싸요.”
“그래도 우선 세탁해보면 될 것 같은데요. 많이 묻은 것도 아니잖아요.”
경찰의 말에 손님은 다시 화가 났지만, 아까처럼 난동을 부리지는 못했다.
“그리고 술도 많이 드신 것 같은데, 남의 영업하는데서 이렇게 행동하면 우리가 데리고 가야 합니다. 어떻게 할래요? ”
경찰의 말에 손님은 조금씩 돌아오는 이성에 행동이 얌전해졌다.
“세탁비는 어떻게 받아요?”
경찰은 그런 걱정은 하지 말라며, 자신들이 알아서 도와주겠다고 취객을 구슬려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태호는 경찰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경찰은 별일 아니라며 태호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고 나갔다.
태호는 정신없이 지나간 일들에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리고는 좀 전의 그 장소를 청소하고 정리를 했다. 서서히 돌아오는 이성에 아까의 상황이 살짝 억울했다. 누구를 탓하며, 원망 할 수 없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떠올랐다. 아까 언뜻 영채를 본 것 같았다고. 영채가 편의점 열린 문으로 다른 손님들 뒤에 서 있었던 것이 이제야 인식이 되었다.
밖을 내다보니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 영채를 본 것 같았다. 아니 확실했다. 그리고 영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는 게 기억이 났다.
설명 할 수 없는 찝찝함이었다. 분명 영채라면 들어와 태호에게 별일 아니라고 잊어버리라고 말할 건데, 그래서 영채가 아니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그런데 분명 영채는 그곳에 있었던 것 같았다. 영채는 그렇게 가버리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