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선배 설마…….”
키리안과 눈을 마주친 엘리야는 엄습하는 불길한 느낌에 몸이 굳었다. 엘리야를 바라보는 키리안의 눈빛이 슬픔을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요즘 저에게 잘해주셨던 거, 이걸 부탁하려고 하신 거였나요?”
키리안의 그런 눈빛을 본 순간 엘리야는 자신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들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망설이는 그녀의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바로 대답하지 못하는 엘리야를 보며 키리안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엘리야가 겨우 소리를 내어 말했다.
“저, 키리안 그게…….”
곧 키리안이 애써 웃으며 엘리야의 다음에 올 말을 막았다.
“아니에요. 제가 괜한 질문을 했어요. 신경 쓰지 마세요, 엘리야 선배.”
그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만큼은 웃지 않고 여전히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그걸 본 엘리야는 몸이 굳어 어떤 말도 더하지 못했다. 키리안은 그런 엘리야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손을 따스히 잡아주었다.
“약속할게요. 책임지고 헬레네의 소식을 가져다드리겠다고.”
그 말을 들은 엘리야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뭔가를 더 말할 수 없었다.
방에 들어와서 엘리야는 문에 자신의 등을 기댄 채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에서 두 팔에 자신의 머리를 묻은 그녀는 생각했다.
‘내가 정말…… 그저, 키리안한테 부탁하고 싶어서 잘해줬던 거였나? 하지만 나는…… 그저 키리안에게 뭔가를 부탁하기엔 이미 받은 게 너무 많았어서.’
엘리야는 키리안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주고, 그가 헬퍼로서 자신을 도왔던 여러 일을 떠올렸다. 엘리야는 키리안이 악몽을 헤매던 자신을 구해줄 때 일을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했다. 그때의 그녀는 키리안이 자신의 헬퍼라 행운이라 진심으로 생각했다.
방금 일도 그랬다. 그는 충분히 서운할 수 있는 일에도 웃는 걸 택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엘리야가 원하는 일을 해주겠노라고 약속까지 했다. 머리가 복잡해진 엘리야는 이마가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키리안이 그렇게 날 돕겠다고 순순히 말할 수 있는 건, 역시 헬퍼라서 가능한 거겠지.’
*
다음날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키리안은 비비안을 직접 만나서 부탁을 했다. 퇴근하고 잠깐 시간을 내줄 수 있냐고 말이다. 그들은 퇴근하고 잠시 바에서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회사를 퇴근하고 ‘Dei est risus‘바’로 곧장 온 키리안은 초조한 얼굴로 비비안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티 없이 맑은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내가 데이트 약속 시간 미루고 온 거 알지?”
바에 들어서자마자 비비안이 키리안 등을 장난스럽게 치며 말했다. 비비안은 키리안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무슨 일로 그렇게 잠시만 시간을 빼달라고 했는지, 들어나 보자.”
“저…… 부탁할 게 있습니다.”
비비안이 뭐냐는 듯 장난스럽게 눈썹을 위로 올렸다. 키리안은 자신이 긴장한 걸 알고, 비비안이 그걸 풀어주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비비안은 항상 이렇게 남의 기분을 빠르게 알아채고, 먼저 배려해주는 천사였다. 그걸 생각한 키리안의 긴장이 풀렸다.
“비비안 님께 헬레네 엘르시아를 조회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비비안의 꿀 빛이 도는 눈동자가 커졌다. 방금까지도 방실방실 웃고 있던 비비안은 순식간에 진지한 얼굴로 변했다. 비비안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엘리야가 부탁한 거니?”
“…….”
키리안이 대답하지 않자 둘 사이의 분위기가 곧바로 가라앉았다. 비비안은 잔을 말없이 마시다가 한참 뒤에 말했다.
“미안한데 그건 어려워. 내가 헬레네를 조회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건 사실이야. 하지만 그건 몇몇을 제외하고 모두에게 조회가 금기된 일이야.”
더 말을 잇지 못한 비비안은 깊은 사색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가끔 입술을 달싹이다가, 키리안과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했다. 비비안이 주변을 살피다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키리안에게 속삭였다.
“사실… 최근에 나도 헬레네에 관해서 의아한 점을 발견하긴 했어. 일단은 내가 알아보고 있는 중이니, 날 믿고 잠시 기다려줬으면 좋겠어.”
비비안이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키리안으로서는 더 이상 요구할 수 없었다. 키리안이 수긍하자 비비안은 자리에서 사뿐히 일어섰다. 그녀는 밝은 얼굴로 돌아와 명랑하게 말했다.
“난 이제 슬슬 가야겠다. 미카엘 님이 약속 시간보다 빠르게 지금 거의 다 오셨네.”
비비안의 말에 키리안은 놀란 얼굴이 되어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길가엔 그 누구의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다. 키리안이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그 말을 듣자 비비안이 씨익 웃으며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가 말했다.
“음, 키리안 이제 슬슬 말해줄 때가 된 것 같네. 어차피 청첩장 곧 돌리려고 했으니까.…… 나랑 미카엘 님 혼약식(魂約式)이 이제 곧 얼마 남지 않았어. 우리 둘다 같이 일하는 입장이라 그동안 비밀로 한 거고.”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은 그동안 그 얼음장 같은 미카엘 천사님이 비비안에게만 유독 다정했던 게 이해가 되었다. 입을 벌리고 놀라던 키리안이 곧 말했다.
“…축하드려요.”
“고마워. 아무튼 나랑 미카엘님은 거의 혼약으로 묶인 사이라는 거지.”
그 말을 들은 키리안은 혼약(魂約)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력한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혼약(魂約)을 하면 혼약자끼리 서로의 컨디션이나 감정 상태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이가 된다는 건 키리안도 알고 있었다. 키리안이 놀란 얼굴을 하고서 답했다.
“그런데 미카엘 님과 비비안 님은 혼약식을 아직 치른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한데, 우리는 혼약을 약속한 사이일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하고 사랑했잖아. 혼약식을 따로 치르지 않아도 어디에 있는지, 지금 컨디션이 어떤지는 가끔 알아서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오더라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는 키리안을 보며 비비안이 살짝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런데 컨디션이 서로 너무 안 좋으면 합의하고, 연결을 끊어놓기도 해. 너무 힘들어지거든. 나랑 미카엘 님이랑 그렇게 서로 맞추는 데까지 꽤 걸렸어. 엄청 싸우기도 하고.”
그걸 들은 키리안은 혼약이라는 것의 의미를 다시 되새겼다. 혼약을 한다는 것은, 서로의 영혼의 무게를 짊어진다는 걸 의미했기에 서로에게 부담이 큰 편이기도 했다. 그래서 혼약식을 치르는 천사나 악마는 적은 편이었다.
비비안이 생각에 잠겨 있던 키리안을 나직이 불렀다.
“키리안.”
“네?”
“너 엘리야와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야?”
그 말을 듣고 키리안 얼굴이 빠르게 붉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곧 키리안의 눈빛은 쓸쓸한 빛을 띠며 가라앉았다. 비비안은 키리안의 얼굴에 떠오르는 슬픔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키리안이 말했다.
“아니요.”
그는 술을 한잔 마신 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엘리야 선배에게 저는 헬퍼일 뿐일 거예요. 저도 그 역할에 충실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슬픈 얼굴을 하고 있지만, 그래도 덤덤하게 말을 잇는 키리안을 보던 비비안이 말했다.
“그렇구나……. 그런데 그런 어려운 부탁을 들어줄 정도로, 키리안 너는 엘리야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
비비안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 키리안의 귀가 빨개진 걸 응시하다가 말했다.
“키리안, 몇 세기 동안 연애한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할까.”
“네?”
“아무리 엘리야를 사랑해도 너의 세계를 잘 지킬 줄 알아야 해. 혼약식을 올릴 천사가 이렇게 말하니까 이상하게 들릴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평상시에 자신의 세계가 그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무너지면, 합쳐지는 게 의미가 없더라……. 엘리야를 정말 좋아하는 건 알겠지만, 네 안의 선을 잘 조절해보라는 거야.”
말을 마친 뒤, 비비안은 고개를 돌렸다가 바의 창문 너머를 봤다. 그 순간 그녀는 오늘 키리안이 본 얼굴 중에 가장 환하게 웃었다. 비비안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가봐야겠다. 내일 봐, 키리안. 부탁 못 들어준 건 미안해.”
“네, 비비안 선배. 조심히 들어가세요.”
비비안은 마치 바닥에 탱탱볼이 튀는 것 같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바의 문이 닫히자마자 두 흰 날개를 펴고 달 쪽을 향해 날아올랐다. 키리안이 창문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달을 배경으로 날개를 펼친 두 실루엣의 그림자가 서로를 껴안는 게 보였다.
*
엘리야는 오늘 키리안이 비비안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 부탁하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숙소 안에서 키리안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소파에 앉은 엘리야는 불안한 기색으로 손톱을 뜯었다.
그렇게 시간이 하염없이 흐르고, 드디어 숙소의 문이 열리는 걸 본 엘리야는 소파에서 일어섰다. 현관에 들어선 키리안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엘리야를 보고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그걸 본 엘리야가 조심스레 물었다.
“비비안님은 역시…….”
“죄송해요 엘리야 선배.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지만 오랜 시간 동안 기대감을 놓지 못하던 엘리야였다. 희망의 빛이 꺼진 엘리야의 눈동자를 보고 키리안이 엘리야를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가 엘리야에게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그걸 본 엘리야는 키리안이 헬퍼로서 자신을 도우려 한다는 걸 알고 잠자코 그에게 자신의 손을 건넸다. 키리안이 엘리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래도 헬레네에 관해 비비안 선배님이 조사하고 있는 게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믿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키리안이 자신의 손을 잡을 때 따뜻한 온기가 자신의 피를 타고 온몸을 도는 걸 느꼈다. 그 동시에 그가 태양을 따다 주겠노라고 말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신뢰감이 들었다.
그녀는 헬퍼인 그에게 무한한 신뢰를 느끼는 자신이 두려워졌다. 그 순간 엘리야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뜯었다. 그러자 키리안이 그 큰손으로 엘리야의 손등을 감싸며 바로 저지를 해왔다.
“그러면 안 돼요.”
엘리야는 그런 키리안을 멍하니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건 키리안의 넓은 어깨였다. 극도의 스트레스로 두통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던 그녀는 키리안의 어깨 한쪽에 머리를 기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생각을 하자마자 엘리야의 얼굴 전체가 붉게 달아올랐다.
‘내가 무슨 생각을……!’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걸 숨기기 위해 엘리야가 고개를 숙여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그 상태로 엘리야가 자리에 벌떡 일어나서 말했다.
“이, 일단 정말 고마워. 나는 피곤해서…… 먼저 방에 들어가 볼게.”
엘리야는 일부러 키리안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방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런 엘리야의 뒷모습을 보던 키리안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엘리야는 불안한 기색으로 자신의 방을 왔다 갔다 했다. 그녀는 이제 더 뜯을 게 없는 손톱을 계속해서 물어뜯으며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계속해서 헬퍼인 키리안에게 의지하려고만 해. 그러면 안 되는 거 너 스스로도 잘 알잖아.’
엘리야의 머릿속에 라파엘이 스쳐 지나갔다. 헬퍼였던 라파엘이 갑자기 사라진 뒤 한동안 엘리야의 인생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 힘들었던 오랜 시간을 엘리야 혼자 견뎠던 걸 떠올리기만 해도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엘리야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헬레네에 대해 알고 싶으면 내가 계속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역시 다시 접근해야 할 곳은…….’
핸드폰을 든 엘리야는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내일 퇴근하고 ‘Dei est risus’바에서 만날 수 있을까?
엘리야가 메시지를 보낸 대상은 바로 레비였다. 그만이 오직 엘리야에게 헬레네에 대한 첫 단서, 헬레네의 담당 천사가 비비안인 것 같다는 정보를 알려준 이였다.
현재 엘리야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모든 퇴로가 막힌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엘리야가 헬레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은, 동기이자 자신에게 정보를 준 그에게 다시 접근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답장은 엘리야가 생각한 것보다 일찍 도착했다.
-얼마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