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도 강이도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흙투성이에, 누가 누군지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어쩌지. 집에 가야 되는데.”
“이 몰골로 내려갔다간...”
“그러게 왜 장난은 쳐갖고...”
순간 화가 난 강이는 혁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가 시작했어? 강이 니가 시작했잖아.”
혁도 지지 않고 화를 냈다.
“내가 언제! 혁이 니가 먼저 던졌잖아!”
“니가 나보고 드럽다니까, 너도 당해봐라! 한 거지.”
“거봐 니가 시작한 거잖아.”
“그러게 누가 놀리래? 왜 놀려? 가만있는 사람을?”
“누가 기지배처럼 질질 짜래?”
“니가 죽은 줄 알았으니까, 울었지.”
“그러니까 혼자 두고 가지 말았어야지..”
‘그래, 맞아. 혼자 둔 내 잘못이었어 첨부터.’
혁은 자기 잘못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론 혼자 안둬. 절대”
“어? 어....”
버럭 하던 혁이 반성모드로 바뀌자, 강이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말문이 막혔다.
“어디 계곡물이라도 찾아보자. 얼굴이라도 씻고 가야지..”
강이가 말하며 주변을 둘러보려 움직이는데,
“앗! 쓰라려!!”
갑자기 강이가 얼굴을 찌푸렸다.
“왜그래?”
혁이 잽싸게 달려가 강이 다리를 보는데, 상처 난 다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진흙에 쓸리면서 딱지가 떨어져 나갔어. 많이 아파?”
“쓰라려.”
“걸을 수 있겠어?”
“걸어봐야지.”
강이가 걸으려고 하자, 혁은 안되겠다 싶어, 등을 내밀었다.
“업혀!”
“뭐?”
“빨리 내려가게...”
“......”
“그 다리로 어떻게 내려가려고. 업혀”
혁이 등을 내밀었다. 강이는 자기도 모르게 침이 꿀꺽 삼켜졌다. 진흙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혁의 등이 오늘따라 더욱더 넓고 어느 때보다 듬직해보였다.
“뭐해. 비 쏟아지기 전에 얼른 가자.”
“괜찮겠어?”
“업혀.”
“어제 보니 안을 힘도 없던데...”
“.........”
“나 보기보다 무거워...”
강이는 괜히 장난이 치고 싶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런데, 혁은 화가 났는지 일어서더니 혼자 내려가기 시작했다.
“말아 그럼.”
혁이 저만치 가는 걸 보자, 강이는 절뚝거리며 쫓아갔다.
“같이 가~~ ”
“......”
“알았어. 업히면 되잖아. 같이 가.”
그래도 혁은 화가 났는지 계속해서 걸어 내려가고 있었다. 강이는 뒤에 대고 버럭 소리쳤다.
“다신 혼자 안둔다더니, 버리고 가는 거야?”
딱! 그 말에 혁이 딱 멈춰 서더니, 돌아섰다. 얼굴은 여전히 화난 게 분명했지만,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업히라는 듯 등을 다시 내밀었다.
“화 풀어.”
“..........”
“어?”
“업히기나 해.”
강이는 고분고분한 아이가 돼 혁한테 업혔다.
“끙~~!”
혁이 강이를 업고 일어섰다. 조심조심 나뭇가지를 잡으며 혁이 조심스레 내려갔다.
한동안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뿐, 적막했다.
쭈르륵!
길이 꽤 미끄러워서 집중을 요했다. 두 사람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어쩜 이렇게 엉망이 됐지?”
강이는 괜히 미안해, 말을 꺼냈다.
“어딘지 알고 가는 거지?”
“.............”
혁은 아무 말도 없이 내려가는데만 집중했다. 두 사람 사이 숨소리 외엔 침묵이 흐르는데...
“미안해. 내가 많이 무겁지?”
“.......”
“나랑 말 안할 거야?”
“괜찮아.”
“진흙싸움만 안했어도 덜 무거울텐데...”
“.........”
“아직도 화났어?”
“아니.”
“근데 왜 아무 말 안해. 화난 사람처럼.”
“생각 좀 하느라고.”
“무슨 생각?”
“.............”
“어?”
“뭐 이런 저런....”
“무거우면 내려놔.”
‘아니, 안내려놔. 힘없다고 또 놀리려고!’
혁은 아무 말도 없이 계속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발이 빠지면서 몸이 비틀거리고
“어어어~~”
두 사람은 한 번에 넘어졌다.
“아야!”
“괜찮아 강이야?”
“응.”
“이럴까봐 집중하느라 말도 아낀 건데...”
강이가 내려온 길을 돌아봤다.
“엄청 내려온 거 같은데, 조금밖에 안내려왔네.”
“그러게...반도 못내려왔어...”
“어, 혁이 너 발목, 봐봐.”
진흙에 푹푹 빠지다보니, 뭔가에 쓸려서 발목에 피가 나고 있었다.
“봐봐.”
“괜찮아. 이정도는.”
“피 나.”
강이는 보려고 하고, 혁은 피하는데, 두 사람 얼굴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 비다.”
깜짝 놀란 혁이 주변을 둘러봐도 비를 피할 곳이 없었다.
“피할 데가 없어. 일단 저기 바위 밑에라도...”
혁이 강이를 업으려는데,
“지나가는 비야.”
의외로 강이는 차분했다.
“뭐?”
“하늘 좀 봐. 저기는 해가 쏟아지잖아. 여기 하늘만 이래.”
“그러니까, 빨리 가자. 업혀.”
“좀 씻고.”
“어?”
쏴아!!! 비가 쏟아지자, 강이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얼굴에 묻었던 진흙이 씻겨 내려가고 있었다.
“시원하다~~~”
강이는 웃으며 온몸을 씻어내듯 문지르고 있었다.
“무서운 거 아녔어?”
평소 계곡물이 무섭다 절대 물엔 안들어가고, 비만 와도 처마 밑으로 달렸던 강이가 비를 마주하니, 혁은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아~~ 시원해. 너두 해봐.”
강이를 빤히 쳐다보던 혁은 강이처럼 두 팔을 벌려 하늘을 향했다. 혁의 몸에서도 진흙물이 뚝뚝 흘러 떨어졌다.
영화 ‘쇼생크 탈출’ 포스터처럼,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비를 향해 양팔을 벌리고 서 있었다.
“어푸어푸”
강이는 세수하듯 얼굴을 막 문질러 진흙을 씻어내기 시작했다. 진흙투성이였던 강이 얼굴이 뽀얗게 다시 되돌아왔다. 혁도 얼굴이며 가슴, 팔뚝을 문지르며 비목욕을 했다.
“이래 봐봐.”
혁이 강이 등에 있던 진흙을 밀자, 진흙물이 주르륵 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강이도 뒤를 돌아 혁을 보며,
“너두.”
그 순간, 혁의 튼튼한 가슴과 팔뚝 근육이 강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강이는 얼른 눈길을 피하며 고개를 숙이는데,
‘아차!’
강이의 가슴이 살짝 부푼 게 티가 나 보였다.
‘내 가슴’
강이는 얼른 두 손을 모아 가슴을 가렸다.
“왜그래?”
“추, 추워서.”
“얼른 가자. 고뿔 걸리겠다.”
“.....”
“입술도 파래졌어.”
혁은 다시 강이를 업으려고 등을 내밀었다. 강이는 넓은 혁의 등을 보면서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늘을 올려다 본 강이는 세수하듯, 얼굴을 비비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뭐해, 안업히고.”
“정말 지나가는 비였어. 비가 그치고 있어.”
“그러니까 빨리 가자. 춥대며.”
강이가 혁한테 업히려고 하는데!
“도련님!”
정남이 부르는 소리에 두 사람은 얼른 돌아봤다. 저 아래 도롱이를 걸친 정남과 신랑이 두 사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사부~~~”
오던 길에 얼마나 다리가 빠졌는지 정남의 무릎까지 진흙이 다 묻어있었다. 강이를 본 정남은 안도감에 얼굴이 환해지며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응 괜찮아.”
“혁이 도련님도 괜찮으십니까?”
혁은 정남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옆에 서 있는 신랑을 보자 화가 나서 그대로 쫓아 내려갔다.
“너 이 새끼!”
주먹을 날려 쌍코피라도 터쳐놔야 직성이 풀리겠는데, 정남이 그런 혁을 잡고 말렸다.
“참으십시오. 나으리들께서 밤새 걱정하셨습니다.”
정남이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그날 신랑은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나, 나는 이제 그만~~”
신랑은 뒤도 안돌아보고 잽싸게 뛰어내려가기 시작했고,
“으아악~~”
중간에 넘어지기도 했지만, 곧바로 일어나 산 아래로 달려 내려갔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도련님?”
정남이 강이 다리를 보며 물었다.
“괜찮아. 혁이 치료를 잘해줘서, 아, 혁이 너 다리 봐봐.”
“괜찮아 이쯤은”
정남은 등에 멨던 보따리를 끌렀다.
“혹시 몰라 옷이랑 몇 가지 좀 챙겨왔습니다.”
안에는 몇 가지 옷이 있었다. 강이는 두루마기를 걸쳤다.
“혁이 도련님도 입으세요. 고뿔 걸리시겠어요.”
“고마워.”
혁이 옷을 입자, 정남이 등에 멨던 도롱이를 강이와 혁한테 하나씩 걸쳐줬다.
“추우시겠지만, 조금만 참으세요.”
“괜찮아 사부. 가자.”
강이가 절뚝이며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이야 나한테 업,”
“도련님 업히십시오.”
혁보다 먼저 정남이 등을 내밀며 강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 다리로는 말 있는 데까지 가기 힘드십니다.”
“아니. 걸어갈래.”
“마님 앓아누우셨어요. 얼른 가셔야죠.”
강이는 할 수 없이 정남의 등에 업히는데, 뒤꼭지에서 쏟아지는 혁의 시선을 느꼈다. 강이는 혁을 돌아봤다.
“안와??
정남한테 업혀가는 강이를 보자 또다시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남이야 가든 말든! 치이!’
“안 올 거냐고?”
“가고 있잖아.”
화난 투로 대답한 혁은 강이를 쫓아 내려가기 시작했다.
“힘들지, 사부?”
“아닙니다.”
“진짜 사부는 안힘든가 봐. 나 꽤 무거운데.”
“도련님 처음 업었을 때...다섯 살 때였죠? 지금도 여전히 그때처럼 가볍습니다.”
“혁은 나 업고, 몇 걸음 가서 끙~ 몇 걸음 가서 끙~...”
뒤쫓던 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내가 언제 그랬다 그래?”
강이가 뒤를 돌아보면서, 메롱~~ 입을 쭉 내밀었다.
‘저게...’
괜히 화가 난 혁은 뒤쫓아 가면서 씩씩댔다.
‘칫 뒤도 한번 안보고 가네.’
강이 뒤통수만 쳐다보며 걷던 혁은 덜컥 큰일났단 생각이 들어 멈춰 섰다.
*******
아, 큰일 났구나.
나도 모르게 어느 새
너를 품어버렸다.
앞으로
계속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다.
니가 죽었다 생각됐을 때
앞이 깜깜하고 무서웠다.
내 몸에 피가 다 빠져나가는 듯,
손가락 하나 가눌 힘이 없었다.
너한테 좋은 친구 해주고 싶었는데,
이젠 그럴 수 없을 거 같다.
아, 큰일 났구나.
이 마음 어쩌면 좋을까.
이런 내 마음 알 리 없는 너인데
네 잘못 없는데
괜히 너한테 짜증나고
괜히 심술이 난다.
아, 정말이지,
너에게
지독하게 빠졌구나.
미친놈!
미친놈!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미쳤구나.
내가 미친놈이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강이야.
난 더 이상 너와 친구 할 수 없겠다.
멈춰지지도 않고
너한테 갈 수도 없고.
어쩌면 좋으냐, 내 마음.
* * * * *
“뭐해? 안오고?”
뒤따라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자, 강이가 뒤를 돌아봤다.
“혁아!”
“어?”
“왜 넋 놓고 섰어?"
정남마저 뒤돌아보자, 정신을 차린 혁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가. 가고 있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이 문제를, 아니 자신이 강이를 좋아하는 문제를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란 걸 알았다.
‘사람 마음이, 몸도 멀어지면, 자연스레 마음도 멀어지지 않을까?’
그래서 한동안 강이가 찾아와도 만나지 않고, 방안에서 꼼짝도 안했다. 하지만, 강이를 안본다고 괜찮은 게 아니었다.
‘어쩌니 강이야. 널 안보는데도, 내 머리엔, 내 속엔 네가 가득 차 있어.’
그리움은 더욱더 짙어지고 커졌다.
‘아~ 강이야!’
강이를 좋아하면서부터 혁은 멎는 게 많아졌다.
심장이 멎었고, 숨이 멎었고, 가슴이 멎었다. 좋아하면 안되는데, 생각하면 안되는데, 머리에서 지워내야 하는데, 그립고 그리워 시간이 멎었다. 온통 강이 생각에 혁의 모든 게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