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 무거워.”
무정한 목소리에 다희는 꼭 감았던 두 눈을 떴다. 두 번째 한 순간 이동은 김 조교의 말처럼 하나 무섭지가 않았다. 벌벌 떨리는 두 팔로 현호의 목을 껴안고 있는 상황이 민망하리만큼.
“흠흠, 미안.”
쳇, 아깐 처음이라고 챙겨주더니. 같은 친절을 두 번 베푸는 인간은 못 되는군. 다희는 입을 삐죽거리며 현호에게서 떨어졌다.
세 사람은 한 건물 복도에 서 있었다. 김 조교는 <301>이라 적힌 현관문 도어락에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다희는 그의 어깨 너머로 ‘0096’, 네 자리 번호를 훔쳐봤다.
“지하철역과 버스 정류장이 도보로 5분, 자취생들의 드림 하우스, 빌라를 소개합니다!” 김 조교는 복덕방 아저씨 흉내를 내며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선 현호는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301호랑은 많이 다르네.”
농구 한 판 해도 될 것 같은 넓은 거실에, 요리할 맛이 절로 나는 ‘ㄷ’자 아일랜드, 도시의 풍경을 시원히 담아내는 통유리 창문까지! 인테리어의 꽃이라는 조명을 비롯해 가구 하나하나가 이루는 조화는 분명 전문가의 손길을 탄 것이었다.
“다희 학생은 여기, 게스트룸에서 지내면 돼. 보시다시피 집도 넓고, 각자 방도 있으니까 같이 생활하는 데 크게 어려움은 없을 거야.”
“네…….”
다희는 호화로운 집 풍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여기서 살면 진짜 행복하겠다.
“어려울 것 같은데요.”
“응?”
현호는 말 한 마디가 행복의 나래를 펼치던 다희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김 조교는 무슨 말이냐며 눈썹을 들어올린 채 현호를 바라봤다.
“나랑 룸메 따위 절대 하지 않는다고. 워낙 완고해서.” 턱짓으로 현호는 다희를 가리켰다.
“어머, 정말? 왜?”
“그게…….”
이래서 말은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거다. 다희는 뭣도 모르고 나불댔던 입이 원망스러웠다.
“현지 학생에게도 좋은 환경을 제공하려고 내가 얼마나 마음을 썼는데. 이런 좋은 혜택을 왜 걷어차? 바보같이.”
“다시, 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검토해 볼 사안이란 생각이 드네요. 애쓰신 조교님을 봐서라도,”
“아니, 그 얘긴 더 할 필요 없어.” 현호가 다희의 말꼬리를 잘랐다. 재론의 여지를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변태는 내 쪽에서 사절이라.”
변태? 김 조교는 입술을 말아 넣으며 어딘가 므흣한 표정을 지었다. 둘이 하룻밤 새 재미난 일이 많았던 모양이야.
“그 문젠 둘이 알아서 하기로 하고! 난 이만 가 볼게, 편의점에 물건 들어올 시간이거든.”
김 조교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두었다. 집 비밀번호를 비롯해 이곳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정리해 둔 안내문이라고 했다.
“너도 가, 남의 집에 침 그만 흘리고.”
매몰찬 현호의 태도에 다희는 입이 댓 발 앞으로 나왔다. 김 조교는 그런 다희를 보며 핏 웃더니 가자, 가자, 하며 현관쪽으로 그녀의 등을 밀었다. 현관문이 닫히고, 단순한 전자음과 함께 문이 잠겼다.
“나 원 치사해서…….”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김 조교는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센티하게 굴어도 이해해줘, 처음엔 다들 저래. 먼 여행을 떠나왔잖아?”
“원래 성격이 개차반인 것 같은데.”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툴툴거리며 다희가 올라탔다.
“남 무시하고, 깔보고, 지 내키는 대로 명령하기 일쑤고. 내 평생 저렇게 싹수 노란 청년은 처음이에요.”
“어릴 때부터 떠받들려 자라서 그래. 천하의 오성가 아들이니 오죽하겠어.”
“오성가?”
1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앞서 가는 김 조교의 소맷자락을 붙잡고 다희가 재차 물었다.
“오성가 아들이라고요? 그 오성전자의 오성?”
“그래. 재벌 7세야, 오성가 셋째 아들.”
“재벌… 7세…….”
오성가는 100년이 지나도 안 망하는구나. 무려 7세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오성의 위세에 다희는 괜스레 입이 썼다.
“치, 재벌가 도련님이면 다예요? 부자가 되기 전에 사람이 먼저 돼야죠!”
건물 밖으로 나온 김 조교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경사 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제법 번화한 거리라 도로 양쪽으로 온갖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그 아이, 첩의 자식이야. 사생아.” 무겁게 가라앉은 김 조교의 목소리에 다희는 놀란 티조차 낼 수 없었다.
“오성가에 들어간 건 본부인이 죽고 난 뒤였어. 열세 살 때지, 그게 아마?”
열세 살 때까지 존재를 부정당한 삶이었다. 오성가 사람이 된 후에도 ‘사생아’라는 꼬리표는 늘 그의 뒤를 따라다녔다.
“남들 눈엔 부족한 거 없이 자란 도련님이겠지만, 그 누구보다 결핍감에 시달렸을 거야. 예민한 성격이 된 덴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거지.” 신호등 앞에 선 김 조교가 목소리를 밝게 바꿔 말했다. “요는, 우리 현호 학생 잘 부탁한다고! 그리고 지금 내가 한 말은 비밀이다? 먼저 말하기 전까진 아는 척 말아줘.”
마침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자 그럼 또 보자, 라고 인사한 뒤 김 조교는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뭔가 엄청난 얘길 들은 것 같아.”
혼자가 된 다희는 멍하니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그때 상념에 빠진 다희를 깨우며 그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인을 확인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어디야.
현호의 목소리다.
“나? 아직 너네 집 앞인데?”
-다행이다.
다희는 고개를 뒤로 돌려 현호가 있는 빌라 건물을 올려다봤다.
-그럼 다시 올라와.
“쫓아낼 땐 언제고 다시 오래?” 말을 퉁명하게 하면서도 어느새 다희의 걸음은 H 빌라를 향했다.
-그냥 와…….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이다희…….
수화구에서 들리는 희미한 목소리 끝에, 우당탕, 하는 소리가 덧입혀졌다.
“여보세요? 김현호, 내 말 듣고 있어? 왜 그래, 어?”
아이씨. 다희는 전화를 끊고 현호의 집으로 힘차게 뛰었다. 마음이 불안하여 자꾸 입술을 물게 된다. 빨리, 빨리, 빨리. 엘리베이터 닫힘 버튼을 다급히 눌렀다. 고작 3층까지 가는 데 왜 이리 오래 걸리는지 모르겠다.
문 앞까지 가서는 초인종을 누를까 하다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렀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집 안으로 들어간 다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눈으로 현호를 찾았다. 조금 전까지 말끔히 정리되어 있던 거실이 아주 난장판이다. 마치 도둑이라도 든 것처럼.
“김현호! 어디 있어!” 거실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거실로 나와 게스트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니 희한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다희…!” 침대 위, 헤드보드까지 타고 올라선 현호가 겁먹은 표정으로 다희를 불렀다. 외침이 분명한데 볼륨은 턱없이 부족했다.
“너… 뭐 해?”
“이리 와.”
“뭐?”
“이리 올라 오라고……!”
그런 그를 미친 사람 쳐다보듯 하며 다희가 침대 위로 올라섰다.
“어어! 나왔다, 나왔어!” 현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엔 동그란 로봇 청소기가 바닥에 붙은 먼지를 열심히 핥아가고 있었다.
“저거 좀 내다버려! 지금 당장!”
“뭐?”
두려움이 깃든 눈동자가 순간 일렁였다. 펄럭, 하는 소리와 함께 다희는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살려줘, 제발.”
목덜미에 뜨거운 김이 닿았다.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갑자기 몸 위로 덮친 중력에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두 개야. 불규칙한 고동이 양쪽 가슴에서 느껴졌다. 그것은 공포와 설렘, 서로 다른 감정이 빚어낸 앙상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