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수건과 수건 사이.
도현은 밤새 작업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작업을 한다고는 앉아 있었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진도는 잘 안 나가고 있었다.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깬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 머리를 털어내고자 커피를 내리려고 할 때 쯤,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야! 강도현!”
“야아? 강도혀언?”
도현은 정말 자신이 들은 소리가 맞는지 곱씹었다. 쩌렁쩌렁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를 사람은 단 한 명이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전혀 다정하지도 미치도록 달콤하지도 않은, 짜증이 가득한 소리로 부르는 거야?
이 여자 제정신인가? 도현은 욕실로 향했다.
“아! 다행이다. 저기 나 수건 좀 갖다 줘요.”
하린은 그제야 한숨을 놓았다. 혹시나 도현이 먼저 나갔거나 바깥에 운동이라도 나갔더라면 정말 상상하기도 싫었다.
10분 전만 해도 도현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던 것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졌다.
지금은 수건만이 중요했다. 감기까지 걸리고 싶진 않았다. 감기까지 걸리게 되면 달다방에서 아예 나오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다.
“지금 내가 들은 게 맞는 거야? 내 이름을 불렀어?”
집주인 님도 아니고 강도현 씨도 아니고, 야! 강도현?
“네. 수건 좀 갖다 줘요.”
도현은 보이지 않았지만 도현이 문 앞에 있음을 짐작한 하린은 좀 더 문을 닫고 몸을 뒤로 뺐다.
‘아이고, 허리야.’
이제는 S가 아니라 몸이 ‘ㄹ’자가 되어 관절이 꺾여 나가기 직전이었다.
“수건을 갖다달라고?”
“네.”
아니, 똑같은 얘기를 몇 번이나 물어보는 거야. 귀가 막혔나!
“오늘은 도대체 뭐로 미친 거야?”
도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욕실에 있는 수건을 욕실 안에서 가져다 달라고 하는 것은 무슨 경우인지.
“하! 이 양반이! 추우니까 빨리 수건이나 갖다 달라고요!”
뻑하면 미친 여자 취급하는 도현에게 욱한 심정을 가라앉히며 하린은 손만 내밀었다. 몸이 달달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수건이 어디 있는지도 알려줘야 하는 거야?”
도현은 하린의 상황을 모르니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갔다. 이제까지는 도대체 어떻게 욕실을 사용 한 거야!
“욕실 안에 거울이 있을 거야. 모르나 본데, 거울을 살짝 누르면…….”
도현은 짜증 가득 담긴 음성으로 아주 친절하게 음절 하나하나 정확하게 끊어가며 수건의 위치를 알려주려 하고 있었다.
“누굴 바보로 알아요? 나도 원래 거기에 수건이 있는 건 아는데, 지금은 없다고요! 수건이 없으니까 좀 갖다 줘요. 가능하면 빨리. 나 정말 추워요.”
수건이 없다고?
도현은 비로소 하린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린다는 걸 알았다. 작게 열린 문틈으로는 내밀어진 손은 마치 초대장 같았다.
‘설마 지금 알몸인 건가……?’
하린이 문 너머로 알몸으로 서 있다는 걸 의식하자마자 도현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젯밤 일이 떠올랐다. 발그레한 하린의 얼굴, 두근대던 심장, 그리고 익숙하지 않은 긴장감. 목이 마르는 것 같았다.
도현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수건이 정말 없어?”
“그럼 진짜로 없지, 가짜로 없어요?”
“유혹하는 건지 의심스러워서 말이야.”
별의 별 사생팬을 다 겪은 강도현이었다. 사실 지금과 비슷한 경우도 한번 있었다. 뮤직 비디오 해외 촬영이 있던 날이었다. 촬영팀 전체가 한 호텔에 투숙했다.
그런데 같이 촬영했던 여배우가 욕실이 고장 났다며 도현의 방에 찾아왔었다. 도현은 욕실 사용을 허락했고, 여배우는 알몸으로 도현에게 달려들었다. 욕실고장은 거짓말이었다.
여태껏 도현이 알아 온 하린은 이런 하수나 하는 수단으로 유혹할 사람은 아니었지만 돌다리도 두드려 봐야 하는 법이니까.
“뭐라고요? 푸하하. 무슨 삼류영화 찍어요? 갑자기 발가벗고 수건을 핑계로 유혹한다니!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하린은 생각지도 못한 도현의 말에 웃다가 문에 기댔다. 그 바람에 문이 그대로 닫혔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지? 말도 안 돼!
어디, 강도현이 유혹한다고 넘어갈 사람이던가. 승훈의 말만 들으면 철벽으로 유명한 사람인데 굳이 넘지도 못할 산을 왜 쳐다보겠는가.
어제는 너무 피곤해서, 그래서 두근거렸던 게 틀림없었다. 마성의 게이인 동시에 슈퍼스타인 강도현, 그 두 가지 선택지 중에 하린이 감당할 수 있는 안은 없었다.
도현은 하린의 깔깔 거리는 웃음에 기분이 이상했다. 절대로 도현을 유혹하지 않을, 아주 편안한 상대가 맞은 편 방 안에 있다는데도 기분이 묘했다.
당연히 유혹할리 없다는 하린의 말이 오히려 더 기분이 상하는 것은 왜 그러는 거지? 내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
“유혹한다고 넘어올 사람도 아니잖아요.”
“넘어간다면?”
“그렇게 쉬운 남자였어요?”
“해보지 않으면 모르지.”
“아니요. 어떤 일은 해보지 않아도 알아요. 혹시라도 내가 당신을 유혹하는 날이 오더라도 절대 옷은 안 벗을 테니 걱정하지 말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있어도 내 매력에 당신이 못 당해낼 텐데 굳이 옷은 왜 벗어요? 안 그래요?”
“자신 있나?”
“그럼요. 나야말로 쉽지 않은 여자라는 것만 잊지 마세요.”
“훗.”
“수건은 언제 갖다 줄 거예요? 좀만 더 있으면 냉동인간이 될 참이에요.”
하린은 덜덜 떨려오는 몸을 두 팔로 감싸 스스로를 안았다. 그럼에도 온기는 너무나 모자랐다.
“기다려.”
도현은 발걸음이 빨라졌다. 하린이 추울 것 같았다. 눈을 막 뜬 온기가 필요한 아기 새처럼 떨고 있을 것이다.
도현은 자신의 방에 딸린 개인 욕실로 들어가 여분의 수건을 챙겼다. 그제야 왜 욕실에 수건이 없게 된 것인지 깨달았다.
<형, 아주머니가 이번 주 개인적인 일로 못 오신다는데 다른 분으로 구해드려요?>
이 집으로 이사 오기 전부터 쭉 같이 일해 주셨던 분이었다. 입이 무겁고 깔끔한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기에 굳이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우는 걸로 다른 사람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승훈에게 괜찮다 했었다.
‘승훈의 출장을 깜박했군.’
가끔 아주머니가 자리를 비우실 때마다 알아서 승훈이 집을 돌봐주었기에 이번에도 으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아니,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승훈도, 아주머니도.
도현은 한숨을 내쉬고 욕실로 향했다. 도현은 수건을 들고 욕실 문을 두드렸다.
“수건.”
“네, 고마워요.”
하린이 달칵, 문을 열고 도현에게서 빼앗듯이 수건을 받아들었다.
하린의 몸은 이미 물기가 많이 없어진 상태였다. 머리에 수건을 돌돌 말고 남아 있는 물기를 닦기 위해 하린은 한 발로 통통 거렸다.
“으아악!”
하지만 몇 발짝 떼지 못하고 그대로 물이 떨어져있던 바닥에 미끄러 넘어졌다.
하린은 알몸에 수건만 머리에 감싼 채로 대자로 쓰러졌다. 머리카락이 아니라 바닥의 물기부터 닦았어야 했다.
“으…….”
갑작스러운 하린의 비명에 멀어지던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도현이 문을 두드렸다.
“박하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하린의 비명이 들려왔다. 도대체 저 작은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박하린! 왜 그래?”
“아아아아아.”
도현이 계속 하린을 불렀지만 하린은 저절로 흘러나오는 신음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깁스한 다리 뿐 아니라, 격하게 꺾여있었던 허리도, 경직된 어깨도, 바닥에 심하게 부딪힌 엉덩이도 눈물이 쏙 나올만큼 아팠다.
“들어간다.”
하린이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자 도현이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역시나 하린이 쓰러져있었다.
도현의 눈에 머리에 수건을 감은 알몸의 하린이 눈에 들어왔다. 뽀얀 살결도 보기 좋은 복숭 아 같은 가, 가ㅅ……,
“꺄아악! 누가 들어오랬어요! 빨리 눈 안 감아요? 아니 다시 나가요! 빨리 나가요!”
하린은 급하게 몸을 굴려 엎드리며 비명을 쏟아냈다.
동시에 도현의 몸이 굳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하린의 모습을 시야에서 차단했다. 눈을 꼭 감았다. 젠장, 그러려던 건 아니었다.
“안 나가요! 빨리! 빨리! 나가라고요!”
하린은 소리를 지르면서 큰 수건으로 몸을 대충 가리려 했다 하지만 불편한 다리와 아픈 엉덩이 때문에 앉을 수조차 없었다.
도현은 하린이 나가라고 소리쳤지만 더 다치지 않았는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해야 했다. 깁스한 다리 때문에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넘어졌으니 멀쩡할 리가 없을 터였다.
“일어날 수 있어? 내가 도와줘야 할 것 같은데.”
계속해서 신음을 내뱉는 하린으로 보건데 그녀 혼자서 일어서거나, 걷는다는 건 불가능했다.
“잠깐, 돌아봐도 될까?”
도현의 목소리가 정중했다. 무작정 돌아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계속 이렇게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아니요!”
“하지만, 내 도움이 필요하잖아.”
“아니에요. 혼자 할 수 있어요.”
하린의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은 아침부터 너무 지친다. 도대체 왜 수건이 없었던 건지! 누군가의 저주 같았다. 어서 빨리 도현이 욕실 밖으로 나갔으면 했다.
“미안하지만, 다섯까지 세고 뒤로 돌게.”
“잠깐만요!”
“하나……,”
“둘……,”
“셋……,”
도현이 숫자를 세기 시작하자 하린은 급해졌다. 어떻게든 몸에 수건을 둘러보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하린은 차례 자세로 반듯하게 누운 채 이불을 덮듯이 수건을 덮었다.
“넷……,”
“다섯, 돈다.”
다섯을 다 센 도현이 돌아보자, 욕실 바닥에 반듯이 누운 하란의 모습이 들어왔다. 넘어진 곳이 아픈지 찌그러진 눈이 좀처럼 펴지지 않고 있었다.
목 아래로는 수건을 이불처럼 덥고 있었지만 그 마저도 미니스커트마냥 허벅지를 아슬아슬 하게 가리고 있었다. 살짝만 움직여도 보일 것 같은 아찔한 모습이었다.
도현은 심호흡을 한 뒤 먼 산을 바라보았다. 아니 욕실에 산이 있을 리가 멀리 있는 타일을 바라보았다. 수건 아래의 모습이 아른거려 하린을 마주보기가 어려웠다. 도현의 얼굴은 포커페이스 그대로였지만 귓불이 달아올랐다.
“일어날 수 있겠어?”
하린이 슬쩍 도현을 바라보자 도현은 하린에게 비껴 저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하린이 누워있는 근처 어느 타일 같았다.
“일어날 거예요. 하아.”
하린이 가쁜 숨을 내뱉었다. 차츰 더 욱신거렸다. 깁스한 다리마저 쑤시는 듯 했다.
“일어날 수 있어요!”
하린은 혹시라도 수건이 떨어질까 반듯이 누운 채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린은 한 손으로 수건을 잡고 다른 한 팔로 몸을 받치고 서서히 일어나려다가 힘이 빠졌다. 신음을 흘리곤 다시 쓰러졌다.
“일어날 거예요. 알아서 일어날 거니까 당신은 나가요.”
하린은 눈을 꼭 감고 주문이라도 외우는 사람처럼 말했다.
하지만 도현은 나갈 수가 없었다. 혼자서는 일어서는 것도 힘들었다. 걷기엔 무리였다.
“일어서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걷는다는 거야?”
“잠깐 쉬었다가 일어날 거예요. 빨리 나가주세요.”
고집스레 말하는 그녀를 그냥 두고 갈 순 없었다. 도현의 양심이, 도현의 심장이 도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는 게 맞았다.
“실례.”
도현은 남아 있는 수건으로 하린의 몸을 감쌌다. 수건으로 몸을 감싸지 않으면 죽기라도 하는 듯 엄청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뭐, 뭐, 뭐 하는 거예요?”
수건을 감싸는 도현의 손이 살짝 하린의 피부에 닿을 때마다 하린은 심장이 쿵쿵 바닥으로 떨어졌다. 만유인력의 사과처럼 쿵쿵 떨어졌다.
어느 정도 하린이 몸이 가려지자 도현이 누워서 움직이지 못하는 하린을 그대로 안아 들었다. 소중하고 조심스러운 몸짓이었다.
하린은 수건만 사이에 두고 도현에게 안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