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화창한 봄날이었다. 고층 사무실의 안쪽 자리라 햇빛이 바로 들어오지는 않지만, 저어쪽 상무님 사무실 근처로 흐르는 햇빛을 보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날씨였다. 꽃샘추위가 가고 봄이 오는 때다. 아직은 꽃놀이를 가기엔 이르지만, 강가를 걷기만 해도 평온해질 터다.
“당신 지금 근린주거시설하고 일반주택을 헷갈리고 있는 거야?”
185cm, 대략 72에서 75kg로 추정. 검은 눈에 검은 눈썹, 전형적인 한국인, 키에 비해 작은 두상과 오똑한 콧날, 날카로운 귓불과 적당하게 도톰한 입술. 결코 나쁘지 않은 육체적 스펙이다. 거기에 꼼꼼한 일처리 능력과 완벽주의적인 성격, 지랄같은 말솜씨를 더하면 눈앞에 서 있는 이 남자가 된다. 박, 진, 우, 팀장.
말단 대리 임소희의 직속상사다.
그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회색 맞춤정장의 잘 만들어진 소매가 펄렁거린다. 곧 뭔가 날아오겠구나, 하고 움츠러든 소희를 노려보던 그가 한숨을 쉬었다. 직장생활은 학교와는 다르다. 학생주임에게 머리를 맞는 것보다, 직속상사가 째려보는 것이 더 무섭다. 이러다가 잘리면, 당장 이번달 월세는 어떻게 부담하나. 좋지 않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렀다.
“지금 회계업무를 하는 사람이 맞아, 당신이? 생각이 있어 없어?”
‘생각이 있어, 없어.’ 는 박팀장이 단골로 쓰는 말이었다. 하루에 한 번은 듣는 것 같다. 다행히 아직 ‘이 뇌가 없는’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 소희는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다행히 폭풍이 멈추었다.
“병아리한테 일을 맡긴 내가 죄지.”
아, 다행이다. 낮고 허스키한 목소리는 곧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고, 평소대로 온건한 어조로 돌아갔다. 화를 내지 않을 때의 팀장은 정말 훈남이다.
퇴근시간까지 자리에 가만히 앉아서 얌전히 서류를 작성했다. 근린시설에 대해서 검색해 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반 주거용 주택과 달리, 아래층이 커피숍이나 식당 등 영업을 할 수 있는 가게로 된 건물이라고 한다. 위층은 집으로 살 수 있고. 그러고보니 친구 영일이네 집이 그랬다.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니구나.
퇴근까지 30분 남았다. 30분이 하루처럼 느껴졌다. 소희는 커피도 마시러 못 가고,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은근슬쩍 눈치를 보았다. 보이지 않게 조그맣게 띄운 외부 메신저를 통해 친구에게 연락했다. 나, 맥주가 필요해. 아주 많이. 아주 많이를 볼드체로 강조하고 싶었으나, 언제 악독 팀장이 자신의 옆에 나타날지 모른다. 그럼 분명히 그 잘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이이이이이임소오이이씨이이이이-!”하고 외치겠지.
시계바늘이 12를 향하는 것을 초조하게 기다리며 힐굽을 까닥거렸다. 딱, 딱, 딱.
6시가 되자마자 벌떡 일어나 핸드백을 집었다. 샤넬 백이면 좋겠지만, 샤넬백을 따라한 보세 브랜드의 검은 가죽 가방이다. 그녀는 가방을 어깨에 메고 그냥 나가려다가 아차 했다.
핸드폰을 두고 왔다.
문앞까지 갔다가 돌아와서 책상을 향했다. 컴퓨터 USB 포트로 연결된 최신형 스마트폰을 분리해서 집어넣고, 잊지 않고 케이블도 챙겼다. 저번에 두고가서 결국 새로 사야 했다. 집에서 충전이 되지 않는 핸드폰을 보며 어찌나 허망하던지, 이제 핸드폰만이 아니라 케이블도 챙기는 꼼꼼한 자신을 보며 소희는 뿌듯해했다.
“또 뭐 두고 갔어?”
들려오는 목소리만 없었다면 더 뿌듯했을 것이다. 저 ‘또’가 매우 거슬렸다.
“두고 간 게 아니라...”
“핸드폰 두고 갔구만.”
쯧쯧 혀를 차며 서 있는 사람은 아니나다를까 박 팀장이었다. 저 양복 값만 해도 내가 들고 있는 가방을 서른 개는 살 수 있겠다. 괜히 그가 입고 있는 양복에도 짜증이 났다.
아직 두고 간 게 아니죠, 문밖에 나가기 전에 돌아왔잖아요. 그 한 마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톡 쏘아붙여버릴까봐, 뭐라고 말실수를 할까봐 소희는 고개를 꾸벅 숙이기만 했다. 막 입술을 달싹이려다가 그만둔 티가 나는지, 팀장이 말을 다시 건네왔다.
“그래도 이번에는 건물 밖까지 나갔다가 돌아오진 않았네?”
소희가 하려던 말과 그리 다르지 않은 말이었다. 그게 더 화가 났다. 그래, 나 단순하다. 아주 펼쳐진 책 같지, 그냥 읽으면 보이지. 살짝 일그러진 표정이 보였는지, 박 팀장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럼, 내일 보자고.”
입사 초에는 저 얼굴만 봐도 설레였는데, 막상 일 년 동안 겪어보고 나니 지긋지긋할 정도다. 그렇다고 발소리를 쿵쿵 내며 퇴근할 수도 없다. 온 사무실이 다 지켜보고 있는게 분명하다. 힐 소리에 체중이 실리지 않게 조심스레 한 걸음씩 디디며, 소희는 다시 한 번 허리를 숙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미영이와 약속한 술집은 이름부터 낯익은 곳이었다. 대학 때부터 단골집이다. 다른 곳은 모두 단정한 회색 벽이지만, 바에 맞닿은 회색 벽만 유독 화려한 물감을 뿌려놓은 듯한 그래피티로 장식되어 있다. 대학 때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저 대학 바로 앞이니까 자주 왔었다. 지금은 마치 대학 생활을 추억하듯,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오게 된다. 지하철로 네 정거장, 환승하고 다시 두 정거장. 계단을 걸어올라가는데 어깨가 저절로 축 처졌다.
술집 앞으로 바로 순간 이동했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술집에 막상 들어가고 나자 기분은 좀 나아졌다. 조금 어두운 조명은 회사 생활과 야근에 지쳐 생긴 다크 서클까지 완벽하게 가려주었다.
회사에서 먼 탓에 이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미영이에게 짜증이 나기도 했다. 하지만 절대로 회사 사람들을 마주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 더 기분이 나아졌다.
예술적인 느낌으로 머리를 기르고 검은 에이프런을 두른 남학생이 접시에 담은 닭튀김과 맥주를 가져왔다. 전에는 이런 서버는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긴 지났나보다. 그때는 아르바이트하는 학생들하고도 거의 낯을 익혀서 아는 사이였다. 신입 아르바이트생이 오면 없는 메뉴를 주문해서 놀리기도 했었다.
술집은 낮의 사무실과는 다른 활기로 가득차 있었다. 이미 맥주 한 잔 들이키고 붉어진 얼굴을 한 친구가 생머리를 손가락으로 꼬면서 피식피식 웃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들은 후였다.
“유학파 소피아가 모르는 것도 있네?”
“유학은 무슨....”
워킹홀리데이로 갔다가 삼개월 만에 농장 일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왔다. 땡볕 속에서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사과 하나 따도 십원이 안 되는 것도 괴로웠다. 차라리 한국에 와서 맥도날드 일이라도 하지, 하고 생각해서 왔다. 나름 고민 끝에 내린 결단이었는데, 돌아와서는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비행기표 값만 낭비한 셈이다.
“그나저나 너, 말은 진짜 빨리 배우잖아. 영어도 금방, 일본어도 금방, 근데 전문용어는 어려워?”
“아니 정말 듣도보도 못한 말이었다니까? 근린시설?”
“그게 왜 듣도보도 못한 말이야? 경제신문 안봐?”
미영이가 닭다리를 집어들며 어이없어했다. 질세라 소희도 잽싸게 닭가슴살을 제 접시로 가져갔다. 철저한 닭다리파인 미영과 퍽퍽살파인 소희는 닭고기를 나눠 먹을 때 딱 적절한 동지였다. 그래서 둘은 대학 때부터 서로 천생연분이라고 놀리곤 했다.
그러고보니 얘는, 일찍부터 월세살이를 탈출한다며 부동산 잡지를 구독하는 애였다. 돈이 모이기 전에 기술을 알아야 한다나 뭐라나. 언제쯤 그 야망을 실현해서 실제로 부동산 투자를 할지 모르겠지만, 몇 년째 줄기차게 종잣돈만 모으는 중이다.
“...그게 너는 잘 아는 분야지만 나는 잘 모르기도 하고 에또...”
“그래그래, 내가 잘못했어. 우리 예쁜 소희, 그 팀장님 맘에 든다더니 이젠 아닌가봐?”
“맘에 들래야 들수가 없다 아주!”
소희는 남은 맥주를 힘차게 들이켜고는, 판사가 판결을 내리듯 탕탕! 힘차게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테이블이 살짝 흔들릴 정도였다.
“키는 크고 얼굴도 잘생겼고 일도 잘하는데! 싸가지가 없다고 싸가지가!”
“거, 소희씨.”
그때 아주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절대로 들을 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소희는 저절로 차렷 자세가 되어 벌떡 일어났다.
“네?”
나지막한 베이스 톤의 남자 목소리는, 바로 한 시간 전에도 회사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절대로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귀까지 천천히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소희는 어쩔 줄 모르고 눈을 껌뻑이며 눈앞에 있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누굴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는데.”
박팀장은 아까와 같은 옷차림이었다. 이 사람도 회사에서 바로 이쪽으로 왔나보다. 그러고보니 팀장도 이 근처의 대학교를 졸업했다고 들었던 것 같다. 어쩔 줄 몰라하는 소희 앞에서, 미영이가 대신 구원의 손길을 건넸다. 아주 재미있어하는 듯, 낄낄거리며 웃는 모양이 얄미우면서도 고마웠다.
“소희 아는 분이세요? 저는 소희 대학 친구인 박미영이에요.”
“박진우라고 합니다.
“같은 박씨네요!”
사교성있고 오지랖이 넓은 친구의 성격이 이렇게 고맙기는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