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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9-07 23:13
[역사] 이태원과 역촌동 등의 지명 유래
  글쓴이 : 스토리야
조회 : 3,263  
   http://story.ugyo.net/front/sub04/sub0402.do [365]
   http://story.ugyo.net/front/index.do [365]
◆ 이태원과 역촌동 등의 지명 유래

지금은 사통팔달로 뚫린 도로를 따라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조선시대만 해도 한양 도성과 통하는 큰 길은 몇 없었다. 당시 양재대로(良才大路, 지금의 강남대로)는 도성에서 남쪽 지방으로 갈 때나 충청도·경상도 지방에서 도성으로 들어올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대표적인 길이었다. 이 길을 중심으로 지금의 신사동 쪽인 한강변에 사평나루와 함께 사평원(沙平院)이라는 관용 숙박시설이 있었다. 

사평원이 있던 사평리(沙平里)는 지금의 신사동 지역 사평나루터를 중심으로 잠원동 지역의 한강변 일대를 가리키는 옛 지명이다. 오늘날 이수교에서 강남대로에 이르는 8차선 도로인 ‘사평로’는 여기서 유래했다.
사평나루는 강 건너 한남동 한강나루를 오가는 배가 많을 때 15척이나 운항할 정도로 번성했었다. 나라에서는 교통의 요지인 이곳에 관리를 둬 통행하는 사람을 통제하거나 큰 바위에 눈금을 새겨 강물의 깊이를 측정해 도성에 보고하도록 했다.
한강의 지형이 바뀔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후 사평리 일대는 작은 비에도 침수가 되는 바람에 ‘한강 메기가 하품만 해도 동네에 물이 들어온다’는 우스갯 말이 생기기도 했다. 

‘원(院)’이라는 시설을 여행객이 자주 이용하게 되면서 지명이 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등이 대표적이다. 서울뿐 아니라 장호원·조치원·사리원·풍수원 등도 모두 원이 운영되면서 얻은 지명이다. 

옛날 서울에서 충청도·경상도로 가려면 사평나루에서 양재대로를 거쳐 양재역을 지나야 했다. 당시의 역(驛)은 말을 타고 이동하던 장거리 여행자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이를테면 지금의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곳이었다. 여기서 휴식도 하고 요기도 하고 말에게 물과 말죽을 먹이며 다음 여행을 준비했던 것이다. 말을 이용하는 정부 관리는 여기서 말을 배정받기도 하고 오래 달린 말을 새 말로 교체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역은 자연스럽게 말과 연관이 많았다.
양재역은 우면산 동쪽 기슭 양재천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말에게 물을 먹이고 말을 씻겨줘야 하니 역은 냇가에 자리 잡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양재역 근처 마을은 ‘역말’이라고 불렸으며 한자로는 ‘역촌(驛村)’이라고 했다.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서 ‘말죽거리’라고도 불렸다.
옛 지도를 보면 한강 남쪽에 ‘마죽거리(馬竹巨里)’ 또는 ‘마죽거(馬竹巨)’라고 표기된 곳을 볼 수 있는데 ‘말죽거리’의 한자식 표기다. 강남이 개발되기 전까지만 해도 양재동보다는 말죽거리라고 해야 알아들을 정도로 유명한 지명이었다.
지금도 전국에는 ‘역말’ ‘역촌’ ‘역곡’ 등 역(驛)자가 들어간 땅이름이 무척 많다. 이런 동네는 대개 옛날에 역이 있었다.
서울의 역촌동이나 경기도 부천의 역곡동 같은 곳이다.
홍제원(弘濟院)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홍제동 지역에 있었던 원이다.고려 및 조선시대 역원제의 실시로 공무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중국으로 향하는 의주로에 위치하여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던 원이었다. 공관이 별도로 마련되었고, 누각도 있었다.
서대문 밖에서 무악재를 넘으면 동편에 위치하였고, 도성과는 가장 가까운 의주로상의 첫번째 원이었던 이유로 중국에서 오는 사신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따라서 중국사신들을 위한 공관을 따로 지어 유숙하게도 하였으며, 사신들이 마지막으로 휴식을 취하고 예복을 갈아입는 등 성 안으로 들어오기 위한 준비를 갖추던 곳이었다.1895년(고종 32)까지 건물이 남아 있었으나 현재는 그 터만 남아 있으며 언제 건물이 없어졌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이태원(梨泰院)은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지역에 있었던 원이다.
공무여행자의 숙박시설로 영남로(嶺南路)로 향하는 첫 번째 원이었다.
원래 위치는 현재의 한강로 2가 부근으로 이태원동보다는 서쪽에 있었다. 현재의 이태원동은 이태원에서 유래하였으며, 명칭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전한다.
조선 초기에는 ‘李泰院(이태원)’으로 한문표기가 달랐는데, 산에서 맑은 샘물이 솟아나 도성 안의 부녀자들이 빨래터로 이용하였고 소나무 숲이 우거져 있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이후 아군에 항복하고 우리나라에 귀화한 일본인들이 거주하였다 하여 이타인(異他人)으로 부르기도 하였고, 왜군들과의 혼혈들이 거주한 곳이라 하여 이태원(異胎院)으로도 불렀다고 한다. 그 뒤 효종 때 이곳에 배나무가 많다 하여 지금의 이태원으로 바뀌었다.이태원이 있던 지역에는 광복 이후 급증한 서울인구의 집단거주지역으로 바뀌어 문화촌·해방촌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주변의 미8군 주둔지역과 연계한 이태원상가가 새로운 상업문화를 형성하여 서울의 명소가 되었다.
조치원(鳥致院)은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읍 지역에 있었던 원(院)으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원이 설치되었다. 일반여행자나 상인을 위한 주막촌(새주막거리)으로 발달한 가촌(街村)으로 최치원(崔致遠)이 이곳에 와서 상업을 장려하고 저자를 개설하였다 하여 그의 이름과 비슷한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하여진다.
백제시대에 두잉지현(豆仍只縣)으로 불렸던 곳으로 신라시대에는 연기현(燕岐縣)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연기군으로 바뀌었다. 조치원은 연기군의 중심지역으로 조치원리였으나 1917년에 조치원면으로, 1931년에는 조치원읍으로 승격되었다.
경부선이 지나며, 중앙선과 연결되는 충북선의 기점인 조치원은 청주·공주·대전·천안의 중앙에 위치하여 각 지역과 국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을 경부고속도로가 지나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이다. 또한, 주변지역에서 생산되는 물자들의 집산지로서 집하 기능도 가지고 있다.
장호원(長湖院)은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지역에 있었던 원으로, 일반여행자나 상인들에게 숙박시설을 제공하였던 주막촌(酒幕村)에서 더 발달한 가촌(街村)이었다. 장호원은 고구려의 노음죽현(奴音竹縣)에 속하였으나 신라시대에 음죽(陰竹)으로 명칭이 바뀌어 개산군(介山郡)에 속하였다.
1018 년(현종 9)에는 충주에 예속되었다가 1414년(태종 14)에 현감을 두어 충청도에서 경기도로 이관하였다. 1895년(고종 32)이천군에 속하였다가 곧 독립된 음죽현이 되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이천군에 속하여 청미면(淸渼面)이 되었으며 그 뒤 1941년장호원읍으로 승격되어 이름이 바뀌었다.
장호원을 통과하는 영남로는 삼국시대부터 이용되던 교통로로서 중남부 내륙지방 보부상의 통행로였던 서울·장호원·상주·부산으로 이어지는 도로로 신작로 건설의 근간을 이루었다.
신작로의 개통 이후 역취락들은 몰락한 반면 도로변에 발달한 장호원은 지방행정·상업·교통의 요지로 성장하였다.
현재도 장호원은 서울에서 충주로 남북을 연결하는 3번국도와 평택·제천·영월을 동서로 연결하는 38번국도가 교차하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여 있다.
역촌동(驛村洞) 동명은 지금의 예일여자고등학교 동쪽 너머 마을의 옛 지명인 연서역이 있던 역말(역마을)에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 경기 6도의 하나인 영서도의 도찰방이 있던 곳으로, 인근에 있던 고양 벽제역(碧蹄驛), 장단 동파역(東坡驛), 개성 청교역(靑郊驛), 풍덕 중련역(中連驛)을 관할하였다.
역촌동은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 성외에 속하였다. 고종 4년(1867)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한성부 북부 연은방(성외) 역계·사계 지역이었다.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1895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해 한성부 북서(北署) 연은방(성외) 역계 역촌동, 사계 상정동이 되었다.
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성부를 5부 36방, 성외를 8면으로 할 때 경성부 은평면 역촌동·상정리가 되었다.
1914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경기도 고양군에 편입되면서 상정동과 역촌동이 합쳐져 은평면 역촌리가 되어 현재의 역촌동 범위가 형성되었다.
1949년 8월 13일에 대통령령 제159호에 의한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시에 편입되어 서대문구 역촌리가 되었다가, 1950년 3월 15일 서울특별시조례 제10호에 의해 서대문구 역촌동이 되었다.
1979년 10월 10일 대통령령 제9630호에 의해 은평구가 서대문구에서 분구되면서 은평구 역촌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출처: 한국국학진흥원 스토리테마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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